이미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백범 김구(金九) 선생과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해방 후 조선민족청년단에서 일하고 있을 때 훈련소에 강의하러 오신 선생을 여러 차례 뵌 적이 있다. 백범이 귀국한 초기에 판공실장(비서실장)을 지낸 신현상(申鉉商) 선생이 우리 몇몇 동지를 여러 차례 경교장(京橋莊)으로 데리고 가 선생을 뵙게 한 적도 있었다. 선생은 그 때마다 따뜻한 격려를 해주고 냉면도 같이 드시곤 했다. 1949년 6월 26일 선생이 현역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됐다. 나는 그 비통한 소식을 듣고 경교장으로 달려갔었다. 많은 군중이 모여 울부짖고 있어 직접 시신을 보지는 못했으나 호곡의 대열 속에서 애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이런 인연으로 나는 1993년부터 95년까지 '백범시해진상규명위원회'의 회장을 맡아 백범 암살의 배후를 조사하게 됐다. 이 위원회는 4·19 후에 이강훈(李康勳) 선생이 회장이 되어 발족되었으나 곧 군사정권이 들어서서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민주화가 실현되자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기운이 조성되면서 백범 선생을 매우 숭모하던,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측근인 김덕룡(金德龍) 의원이 앞장서서 이 운동을 다시 시작하게 됐다. 김 의원은 김 대통령과 백범 시해 진상 규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것을 상의한 후 이 운동을 시작한다고 했다.
주요 참여인사를 보면 명예회장에 이강훈선생을 모셨고 내가 회장, 김덕룡 의원이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이만열(李萬烈) 신용하(愼鏞廈) 등 사학자들, 그 후 광복회 회장을 맡게 된 김우전(金祐銓) 윤경빈(尹慶彬) 장 철(張鐵)씨, 이원범(李元範) 삼일운동기념사업회장, 태윤기(太倫基) 변호사,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에서 활동해온 정인명(鄭寅뾢) 이창근(李昌根) 김석용(金奭鏞) 곽태영(郭泰永)씨, 강신옥(姜信玉) 의원 등이 주요한 활동을 했다.
조사 활동은 주로 김 의원과 가깝고 출판사업을 하던 김석용씨가 많이 했다. 그는 병상에 누워있는 안두희를 몇 차례 만나, "이제는 역사의 진실을 밝혀라, 당신도 나라를 위해 한 일이라면 숨길게 뭐냐"고 설득을 했다. 안두희는 그 때 병상에서 일어나 눈물을 흘리며 자백을 했고, 김씨는 이를 녹음했다. 후에 국방장관을 한 신성모(申性模)씨까지는 개입됐고, 시해한 그 다음해 4월에 포병사령부 주최로 워커힐에서 사격대회를 할 때 안두희 자신이 일등을 했는데 뜻밖에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직접 시상을 하며 격려를 했다고 했다. 그 후 투옥된 그는 6·25 때 석방돼 대위까지 승진했다가 제대한 후 군납을 해 돈을 많이 벌었다. 김석용씨가 안두희를 데리고 김구 선생 묘소에 갔더니 울면서 잘못을 회개하고 참배를 했다고 했다.
그 사이에 권중희(權重熙)라는 사람이 안두희를 죽인다고 쫓아다니다 부상을 입혀 인천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것을 이강훈, 김석용, 곽태영씨 등과 함께 찾아가 위문하기도 했다.
그런데 신성모씨 위로는 더 조사가 진행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만섭(李萬燮) 국회의장에게 자료를 다 주고 국회에서 확인한 뒤 발표해 달라고 했다. 강신옥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백범시해진상특별조사위원회가 만들어져 진상을 발표했다. 백범을 시해한 것은 정권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진행한 것이었고, 최고 배후자는 신성모까지 올라간다는 내용이었다.
그 뒤 시해진상규명위원회는 백범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로 바뀌었고 내가 회장, 김덕룡씨가 건립추진위원장을 맡게 되었으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정부가 들어서면서 물러나게 되었다. 역시 백범을 존경하는 김 대통령이 160억원을 정부예산으로 지원해 효창공원에 훌륭한 기념관을 지었다. 안두희는 그 후 뜻밖에 버스 운전을 하던 박기서(朴琦緖)씨라는 사람에게 96년 암살당했다.
백범 시해 사건은 우리 민족사에서 치욕스럽고 한스러운 일이다. 나는 이 박사가 지시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박사의 지나친 충성 분자들이 해방당시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과 초대 대통령 이 박사를 멀리하게 만들었고 암살까지 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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