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30일 막을 내린 '서안화차'(한태숙 작·연출)의 무대는 빛과 소리가 빚어낸 상상력의 향연이라 할 만했다. 무대가 진시황릉으로 뒤바뀌고 빼곡하게 늘어선 거대한 조각상들이 위용을 드러내는 순간의 섬뜩함은 잊을 수가 없다. 동성애 연기에 현실적인 부피감을 입힌 박지일, 쩌렁쩌렁 울리는 중국어 대사로 서늘한 느낌을 준 최일화. 그리고 그들 못지않은 한 배우가 눈에 띄었다. 찬승 역의 이명호(36)였다.늘씬한 키, 세련된 외모때문만은 아니었다. 느물거리는 말투와 비웃는 듯한 눈매, 이지적인 악역 연기 때문이었다. 상대인 주인공 상곤(박지일)을 빈정대고 무시할 때는 은근히 기분까지 나빠진다. 연약하고 소심한 상곤에게 감정이입이 된 관객은 상곤의 진심을 차분하면서 명랑하기까지 한 분위기로 짓밟는 찬승을 보면 분노가 치민다.
3월에 극단 목화에서 올린 '자전거'(오태석 작·연출)를 본 사람이라면 윤서기 역을 맡아 고뇌와 열정어린 연기를 보인 이명호와 '서안화차'에서 찬승의 이명호를 구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알아보는 분도 있다. 연기를 하고 있는데 '서안화차'에서 그 재수 없는 배우 아니냐고 객석 앞에서 속닥거리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악역이 잘 어울린다"고 했더니 그는 펄쩍 뛰면서 자신은 "정말 착한 사람"이라고 강변했다. 이명호는 관객을 압도하는 배우는 아니다. 낮은 저음으로 무대를 장악하기보다 낭랑하고 리듬감 있는 목소리로 관객을 슬슬 극으로 빠져들게 하는 쪽이다. '서안화차'에서 길고 복잡한 문어체 대사도, '자전거'에서의 경남 거창 사투리도 그의 목소리를 거치면 듣기 좋은 음악이 된다. 서울예술대학에서 연극을 공부했고, 제대 뒤 학교에 놀러 갔다가 극단 목화에 스카우트 되었다. 한명구 손병호 정원중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기에 눌려 처음엔 고생하다, 99년 '천년의 수인'에서 계엄군 병사 역을 맡으며 주목을 받았다.
'서안화차' 공연 도중 박지일을 들어 올리다가 허리를 삐끗, 앰뷸런스에 실려가고 몸무게도 62㎏까지 빠지는 등 요즘 몸이 좋지 않다. "한국전쟁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자전거'나 비극적인 사랑의 결말을 다룬 '서안화차' 모두 기가 드센 작품이라 그런 것 같다." 4일부터 7월4일까지 아룽구지극장에서 재공연하는 '자전거'는 막걸리를 한 되 마신 뒤, 자전거를 타고 밤길을 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극이다. 그 밤길은 굴곡진 현대사의 뒤안길이기도 하다.
요즘은 부쩍 관객에게 책임감을 많이 느낀다. "처음엔 내가 좋아서 연극을 했는데, 이젠 아닌 것 같다. 연극을 보러 온 수 많은 관객을 책임져야 한다." 다시 올릴 '자전거' 에서의 욕심도 다부지다. "다른 사람이 내 역인 윤서기를 해서 더 많은 걸 보여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건 괴로운 일이다."
반듯하고 진지한 모습이 찬승보다는 윤서기에 가깝다. 찬승처럼 양성애자도 아니다. 7년 열애 끝에 무용가와 결혼해 두 살 배기 아들 하나를 두었다.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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