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천연기념물 1호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 지 아십니까. 대구 도동의 측백나무수림이 천연기념물 1호입니다. 아마 이런 사실을 모르는 대구 시민도 많을 겁니다. 하지만 따로국밥만큼은 누구나 대구의 향토음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국일따로국밥'의 큰 아들 서경덕(徐敬德·41)씨는 천연기념물에 빗대 따로국밥의 의미를 풀이한다. 둘은 전혀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발상이 일면 그럴 듯하다. 자부심 또한 만만찮게 느껴진다.대구공항을 끼고 팔공산을 향해 달리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도동에 다다른다. 그 마을 앞 개울 건너 절벽에 1,600여 그루의 측백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조선 초 문신 서거정은 자신의 문집 '사가집(四佳集)에서 '대구십경'을 노래했는데 측백나무수림을 제6경으로 꼽고 '북벽향림(北壁香林)이라는 시로 찬양했다. 여기서 향림은 수백길 낭떠러지에 매달려 자라고 있는 측백나무를 일컫는다.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수령 500년 이상 고목도 160여 그루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경덕씨의 자부심은 측백나무수림이 대구의 볼거리라면, 따로국밥은 먹거리를 대표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실제로 음식문화가 척박한 이 고장에서 맛을 떠나 전국적인 명성을 획득한 음식이 따로국밥인 것만은 틀림없다.
"설렁탕이나 곰탕 맛은 어느 지방을 가도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따로국밥은 대구가 아니면 그 진미를 느낄 수 없습니다." 국일따로국밥(중구 전동 7-1) 주인 최영자(崔英子·65)씨는 당당하게 말한다. 이 집이 바로 따로국밥의 원조다. 최씨가 시부모(서도술·김이순)의 뒤를 이어 장사를 한지도 어느덧 40년 세월이 흘렀다. 최씨가 시집오던 때만해도 고깃국은 명절 때만 맛보는 귀한 음식이었다. 그런 시절 고깃점이 푸짐하게 들어간 국밥이야 말로 진수성찬이나 다름 없었다. 거기에 값마저 저렴했으니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국일따로국밥은 광복 이듬해인 46년 최씨의 시부모가 창업했다. 장소는 지금은 헐린, 한일극장 부근이었다. 그 무렵 인가가 드물었던 중앙 사거리에는 이른 새벽 나무시장이 섰다. 땔나무를 팔고 사러 오는 사람들로 붐볐다. 최씨의 시아버지도 나무를 해다 팔았다. 장터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던 터라 시어머니는 지아비를 위해 장터로 국밥을 말아 날랐다. 없는 살림에도 베풀기를 좋아했던 시아버지는 주위에서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나무꾼들을 불러 국물 한 모금씩을 권했다. 차마 혼자서는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나눔의 아침이 계속되다 보니 주위에서 음식장사를 권했다. 그렇게 시작된 음식장사는 차츰 입소문을 타고 널리 알려지게 됐다. 당시 만해도 고기를 사면 도축장에선 선지와 뼈는 덤으로 거저 주었다. 그러니 음식점을 내는데 큰 돈이 필요 없었다.
처음에는 국에 밥을 말아 팔았다. 다만 나이든 어른들이 올 경우 예의에 어긋날까 봐 국과 밥을 따로 내놓았고 그런 상차림을 좋아하는 손님이 차츰 많아 졌다. 그래서 국밥이 따로국밥이라는 이름으로 진화를 하게 됐다. 대구의 향토음식으로 자리잡은 따로국밥은 이렇게 최씨 시부모의 손에서 태어났다. 국일(國一)이라는 상호는 시아버지가 지었다. 비록 값은 싸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을 만들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지었다. "하도 오랜 세월 국밥을 끓였더니 요즘은 그리 자주 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하루 세끼를 다 국밥으로 해결하는 날이 많거든요. 내 자식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음식인데 어떻게 소홀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여행사를 운영하면서 어머니를 거들고 있는 경덕씨는 가업계승을 겨냥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왔다. 대학원에서 관광경영학, 그 것도 외식경영을 전공하고 있는 이유도 준비작업의 하나다. 또한 외국여행 때마다 역사가 오래된 음식점을 빼놓지 않는다. 특히 일본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부자가 함께 손님을 맞으며 아버지가 아들에게 손님접대 예절과 요리법 등을 가르쳐주는 모습을 보고 가업계승과 전통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일본에는 300년 된 오뎅집, 600년된 만두집이 있다고 들었는데 우리 집도 그런 전통을 쌓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고 말한다.
그의 각오는 대학원 논문준비를 위해 설문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더욱 다져졌다. 음식점주인 1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자식에게 물려주겠다는 답변을 한 사람이 고작 5명에 지나지 않았다. 예상보다 훨씬 어긋난 결과였지만 그의 결심은 변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여전히 대물림을 반대하는 눈치다. 배울 만큼 배웠는데 보다 보람있는 일을 해보라고 틈만 나면 아들에게 권한다.
김수학 전 국세청장은 국일의 전도사다. 경주에 살고 있는 그는 지금도 한 달에 한 두번 찾아온다. 언론에 대구의 향토음식을 소개해달라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예외 없이 이 집의 따로국밥을 꼽는다. 올 때마다 개근상을 달라고 농담을 건네는 단골도 20여명이나 된다. 모두 60, 70세 된 손님들인데 어쩌다 새벽에 이들 중 누구라도 보이지 않으면 국일 식구들은 절로 걱정이 앞선다.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배고팠던 시절 태어난 따로국밥은 대구시민의 보살핌으로 성장해왔다. 절벽에 붙어서 꼿꼿하게 수백년을 자라온 측백나무처럼 국일따로국밥도 변함없는 모습을 간직할 것이라고 경덕씨는 자신한다. 그 것이 또한 대구시민의 바람일 것이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도움말 김용범(소설가)
■저렴한 가격에 영양 풍부 양념배합 얼큰한 맛 좌우
대구는 예로부터 딱히 자랑할만한 향토음식이 없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 같다. 따로국밥은 그런 배경 속에 태어나 향토음식의 위상을 획득했다. 대구는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인데다 주위에 평야도 발달되지 않아 물산이 그리 풍부하지 못한 까닭에 애당초 음식문화가 형성될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대구음식은 짜고 매운 게 특징이다. 이는 지형과 기후적 조건을 반영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내륙인 까닭에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무덥다. 이러한 기후적 특성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음식도 맵고 짠 전통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따로국밥 역시 그런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따로국밥의 맛은 고춧가루, 다진 마늘 등 양념배합에서 우러나온다. 얼큰하고 구수한 맛은 양념이 좌우한다. 따로국밥집마다 사골을 고는 불의 세기와 시간, 양념배합은 영업비밀이다. 사골은 24시간 푹 곤다. 사골을 골 때 쇠고기의 여러 부위를 함께 넣어 끓인다. 간을 한 사골국물에 펄펄 끓인 선지를 고명으로 얹는 것이다. 따로국밥에서 선지는 어디까지나 고명의 역할에 머무른다. 그래서 선지를 싫어하는 사람은 빼고 주문할 수 있다. 따로국밥은 비싸지 않으면서도 단백질 칼슘 철분 등이 풍부한 균형 잡힌 음식이다.
국일따로국밥의 가마솥 3개는 일년 365일 불이 꺼질 날이 없다. 추석이나 설날 하루 쉬는 동안에도 사골 끓이는 가마솥의 불은 활활 타오른다. 이 집 주방에는 직경 91cm 짜리 대형 가마솥이 3개가 있다. 각각 사골, 선지, 국밥을 만드는 솥으로 기능이 서로 다르다. 특따로국밥은 6,000원, 따로국밥과 따로국수는 4,500원이다. 따로국수는 밥 대신 국수를 말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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