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남극의 빙산이 갈라지기 시작한다. 온실효과 때문이다. 무너지고 쪼개진 광장만한 빙산은 바다로 흘러들어가 바닷물의 염분 농도를 떨어뜨리며 해류의 흐름을 방해한다. 결과는 끔찍했다.각 대륙에 따뜻한 기온을 실어 나르는 해류가 움직이지 못하면서 인도 뉴델리에는 때아닌 폭설이 쏟아진다. 일본 도쿄에는 벽돌만한 우박이 떨어지고, 미국 뉴욕에는 사흘 내리 집중 호우가 퍼붓는다. 바로 세계 곳곳의 이상기후가 인류 대재앙인 빙하기의 시작이었다.
'고질라' '인디펜던스 데이' 등을 만든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투모로우(The Day After Tomorrow)'는 지구의 절반을 얼음으로 뒤덮어 버리는 재앙영화다. 괴수나 외계인이 재앙의 원인이었던 전작들과 달리, 인간이 재앙의 원인이다. 무분별하게 쏟아낸 각종 공해가 지구를 뒤덮어 온실효과를 유발하면서 빙하기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 결과를 충격적이면서도 장엄한 영상으로 보여준다. 수 십층 높이로 일어선 물마루가 성벽처럼 뉴욕을 둘러싼 채 밀고 들어오고 돌풍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토네이도가 로스앤젤레스를 짓이기는 장면은 대자연의 위력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는 인간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다. 가슴까지 물에 잠긴 자유의 여신상과 한쪽 면이 완전히 뜯겨나간 마천루의 잔해는 흉폭한 야수가 할퀴고 간 상처처럼 처참하다. 자연은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인과응보 법칙이 끔찍하다. 1억8,000만달러를 들여 컴퓨터 그래픽과 특수효과를 총동원해 만든 허구와 상상이지만, 마치 현실처럼 느껴진다.
에머리히 감독은 이 모든 재앙을 불러온 사람들, 특히 경제개발 논리에 치우쳐 환경보호정책을 뒷전으로 미룬 정치가들을 주인공인 기후학자 홀(데니스 퀘이드)교수의 입을 빌려 질타하고 있다. 환경정책에 무지를 드러내 홀 교수에게 질타를 받는 벡커 부통령(케네스 웰시)은 지금 미국의 부시 대통령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부시 행정부는 온실효과감소를 위해 배기가스 규제를 목표로 추진중인 교토의정서 비준을 계속 거부하고 있다.
참혹한 꼴을 당해야만 인간은 겸손해지는 것일까. 이를 역설하듯 영화는 고개숙인 미국 정부의 모습을 강조한다. 지금까지 막강한 권세를 과시하며 '세계의 정부'를 자처했던 미국 행정부는 부랴부랴 짐을 싸, 얼음으로 뒤덮은 북반구의 강추위를 피해 멕시코로 피난을 떠난다. 그리고 피난 길에 대통령이 동사하는 수모까지 안긴다. 멕시코 한 켠에 더부살이를 하며 "우리를 받아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초라한 부통령의 모습에서는 더 이상 외계인의 비행접시를 향해 미국 대통령이 전투기를 몰고 돌진해 지구를 구하는 슈퍼 영웅( '인디펜던스 데이')의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다.
대신 그곳에는 빙하도 얼릴 수 없는 따뜻한 부정(父情)이 자리잡고 있다. 홀 박사는 동토로 변한 뉴욕에 고립된 아들 샘(제이크 길렌할)을 구하기 위해 눈보라를 뚫고 달려간다. 수 많은 사람을 빙하 속 맘모스처럼 얼려버린 강추위 속에서도 끄떡없이 살아 남아 아들을 구하는 그의 모습 역시 할리우드식 또 다른 영웅주의이지만, 인류의 생존을 책임진 양 메시아를 자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실적이다.
영화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빙하기의 도래는 시작보다 결말이 더 무섭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기원전 1만5,000∼1만7,000년전 빙하기가 끝나면서 각 대륙에 뭉쳐있던 얼음 덩어리들이 일종의 물폭탄 역할을 했다. 댐 속에 갇혀 있던 물처럼, 녹아 내린 빙하는 순식간에 대륙을 휩쓸어버리는 거대한 홍수로 변했다는 것. 과학자들은 그때 대륙의 일부였던 일본 및 몰타 열도, 인도 옆의 실론 섬 등이 지금의 섬으로 변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연히 당시 도시를 건설해 살아 남았던 인류 또한 순식간에 수장돼 버렸다.
'투모로우'는 불과 1주일 만에 온 세상을 얼음으로 뒤덮은 강추위 속에서 살아남은 인류의 모습을 보여주며 모든 시련이 끝난 것처럼 희망을 얘기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진짜 희망은 이런 대재앙을 맞기 전에 모든 인류가 노력하는 현실에 있다'가 아닐까. 다른 재앙 영화들처럼 끝나고 나면 그렇지 않은 현실에 감사하며 가슴만 쓸어 내리고 잊어버린다면 '투모로우'는 언젠가는 영화가 아니라 현실의 '내일'일 수 있으니까. 12세관람가. 4일 개봉.
/최연진기자 wolfpack@hk.co.kr
● 재난영화의 진화
재난영화의 흥행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인터넷 영화사이트의 문구. '건물이 불타고, 배가 가라앉고, 비행기가 추락하면 박스오피스는 달아오른다.' 재난영화가 흥행의 돌파구로 자리매김한 것은 1970년대. 당시 할리우드는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대형 재난영화를 앞다퉈 만들었다.
거대한 여객선의 침몰을 다룬 '포세이돈 어드벤처'(72년), 130층 건물이 화염에 휩싸이는 '타워링'(74년), 로스앤젤레스의 지진 참사를 소재로 한 '대지진'(74년) 등이 대표적. 이들 1세대 재난영화는 주로 화재, 침몰, 지진 등 국지적인 재난을 소재로 다뤘다. 또 재난의 참상보다는 재난에 맞서는 인간의 의지 등 인물 중심의 드라마를 중시했다.
반면 화산폭발, 토네이도, 혜성충돌 등을 소재의 폭을 넓힌 90년대 2세대 재난영화들은 드라마보다 막대한 돈을 들여 재난의 폐해를 재현하는 대규모 볼거리에 치중했다. 최고의 화재 영화로 꼽히는 '분노의 역류'(91년), 건물까지 날려버리는 돌풍의 위력을 과시한 '트위스터'(96년), 초호화 여객선 타이타닉의 비극적인 최후를 다룬 '타이타닉'(97년), 이글거리는 용암이 사람들을 덮치는 '볼케이노'(96년)와 '단테스피크'(97년) 등은 실제와 구분이 가지 않는 사실적인 묘사로 관객들에게 '강 건너 불구경'하는 재미를 선사했다. 90년대 후반부터는 이마저도 성에 안차 인류의 멸망까지 들먹이고 있다. 거대한 혜성의 충돌 위기에 놓이는 '아마겟돈'(98년)과 '딥 임팩트'(98년), 외계인의 침공을 다룬 '인디펜던스 데이'(96년)는 규모면에서 기존의 재난영화를 압도했다. 4일 개봉하는 '투모로우'도 마찬가지.
국내에서 그럴 듯한 재난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2000년. 이주엽 감독의 '싸이렌'과 양윤호 감독의 '리베라 메' 가 있다. 공교롭게 두 편 모두 화재를 소재로 다뤄 건물과 사람을 삼키는 화염을 컴퓨터그래픽과 특수효과로 실감나게 묘사했다. 그러나 특수효과에만 치우친 나머지 등장인물들의 드라마적인 요소가 부족해 아쉬움을 남겼다.
/최연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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