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에 나는 시민운동 외에도 선열들의 기념사업을 맡아 전기 출간, 동상 건립 등의 일에 진력했다. 91년 4월 초에 한모음회 사무실로 이강훈(李康勳) 광복회 회장 송남헌(宋南憲) 박진목(朴進穆) 여철연(呂澈淵) 선생 등 원로들이 나를 찾아왔다. 이 분들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특이한 존재인 김상옥(金相玉·1890∼1923) 열사 나석주(羅錫疇·1892∼1926) 열사 기념사업회가 있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할 일을 못하고 있으니 그 회장을 맡아서 열사들의 빛나는 정신과 업적을 선양하는 사업을 해달라고 부탁했다.이들은 80년대 말부터 민족통일을 민간 차원에서 추진하기 위하여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고 있던 민족통일촉진회에서 가까워진 분들이었다. 민족통일촉진회는 4·19후 이승만(李承晩)정권 하에서는 어려웠던 통일운동을 민간차원에서 추진하기 위해 당시 재야원로 중 통일문제에 관심이 깊은 정석해(鄭錫海) 연세대 명예교수와 함석헌(咸錫憲) 이강훈 이동화(李東華) 김재호(金載浩) 선생 등이 중심이 되어 발족한 단체이나 군사정권 하에서 별다른 활동을 못했다. 87년 6·29이후 민주화로 조직 활성화의 계기를 맞았지만 모임의 주역들이 노령화되고 재원 조달도 어려워 나에게 위원장을 하라고 해 송남헌 선생이 회장, 내가 위원장을 맡아 토론회, 세미나 등을 더러 하고 있던 때였다. 나는 이 원로 분들의 간곡한 청을 받고 두 열사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게 되었다.
두 분 열사는 항일운동사상에 있어서 독특한 광채를 발하는 순국선열이다. 두 분이 다 상해임시정부 시절에 무장투쟁을 가장 활발히 전개했던 의열단의 단원이었다. 김 열사는 1923년 사이토(齋藤實) 총독을 암살하고 일제의 식민통치의 심장부를 공격할 목적으로 국내에 잠입, 2월22일에 종로 경찰서에 폭탄세례를 퍼부은 후 은신하다 포위망을 좁혀오는 일제 경찰 수백 명과 혈전을 전개한 끝에 15명의 일경을 살상하고 최후의 권총 일발로 장렬하게 자결했다. 나 열사 또한 일찍이 항일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것을 각오하고 상해로 망명해 의열단원이 되고 1920년 김구(金 九) 김창숙(金昌淑) 선생 등의 밀명을 받고 서울에 잠입한 후 남대문옆 중국인 여관에 유서를 써놓고 을지로에서 작전을 개시, 일제 경제침략의 본산인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진 후 일경들과 시가전을 벌이다 자결, 장렬하게 순국한 민족정기의 화신이다.
이 분들의 훌륭한 애국정신과 유지를 후세에 바로 전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할까 협의하던 중 전기 출판과 동상 건립이 좋겠다는 의견이 모여 상당한 기간을 두고 추진했다. 김상옥 열사는 김해 김씨로 종친회로부터 7,000만원을 기부 받고, 유가족들이 모은 5,000만원과 뜻 있는 인사들의 희사 등 약 1억5,000만의 비용을 갖고 동상을 건립하게 되었다. 98년 5월28일에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에 동상을 건립했다.
나 열사의 경우 나씨 종친회의 힘이 없다고 하여 큰 도움을 못 받았고, 민족사업에 뜻이 있는 대구의 우종묵(禹鍾默) 선생과 그의 계씨 등이 돈을 모아 1억2,000만원을 희사했다. 여기에 모금한 약간의 돈을 합쳐 나 의사의 거사 장소인 동양척식회사가 있던 현 명동입구 외환은행 뒤뜰에 99년 가을에 동상을 건립하고 제막식을 가졌다.
앞에서 말한 민족통일촉진회 위원장으로 일하던 중에 뜻밖의 간첩 사건을 겪은 적이 있다. 임원의 한 사람인 김낙중(金洛中)씨가 이선실(李善實)이라는 북한의 고위 간첩과 접촉하여 자금을 받은 사실이 밝혀진 놀라운 사건이었다. 김씨는 여러 강연회에서 수 차례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데 평화통일을 주장하고 언행이 겸손해 꿈에도 그런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부 젊은 층의 공격을 받아 송남헌씨와 나 등이 그만두고 이 모임을 이끌었던 분들도 물러났으며, 초기에 선배들을 모시고 활동했던 박진목씨가 그 정신을 이어 새로운 동지들을 규합해 민족정기회를 발족시켰다. 나도 이사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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