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동북아 3국은 세계화와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 유럽연합(EU) 등 경제공동체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동북아 경제협력을 구체화하는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또한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를 계기로 동아시아 차원의 경제협력을 제도화하는 방안이 적극 모색되고 있다. 일본은 동아시아 경제협력과 동북아공동체에 대해 어떤 생각과 전략을 갖고 있을까. 과거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들과 양자간 경제협력을 유지하면서도 아태경제협의체(APEC), 동아시아 경제그룹(EAEG)과 같은 다자간 지역제도를 창설하는데 소극적이었다.
미국의 반대도 있었지만, 일본의 주도적 역할을 대동아공영권의 부활로 보는 동아시아인들의 비판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관세무역일반협정(GATT)과 세계무역기구(WTO) 등 자유주의적인 다자간 무역체제가 일본의 경제이익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자국기업의 무역확대와 지방정부간 경제협력을 진작하는데 힘썼다.
하지만 일본은 동아시아 금융위기를 계기로 동아시아 경제협력 제도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아시아 경제권 형성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일본의 경제이익을 늘리는 데는 경쟁력 강화만으로는 어렵고 동아시아 지역의 이익원을 적극 활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경제협력의 제도화는 일본의 유력한 정책적 선택이었다.
일본의 동아시아 지역구상은 "동아시아 경제제휴의 제도화에 의한 동아시아 경제권(비즈니스권)의 확립"으로 요약된다. 이는 경제이익의 확대와 효율화를 위한 기반 구축의 일환으로서 동아시아에서 양자간 경제관계를 다자간 경제관계의 틀로 바꾸며, 일본의 경제활동 거점을 구축하는 것을 뜻한다. 일본은 이를 통해 동아시아의 정치사회적 안정과 경제발전을 꾀하는 한편, 수출시장 확보, 역내 거래비용 삭감, 경영자원의 최적배분을 이룩함으로써 일본의 지구적 경쟁력을 향상시키고 경제개혁을 활성화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일본의 동아시아 경제권 구상의 기본축은 동아시아와 경제다. 그런데 '동아시아 경제권'과 '동북아 공동체'는 구분해야 한다. 일본에게 동북아 경제협력은 동아시아 경제권 구상의 중요한 일부지만 전체는 아니다. 일본정부는 동아시아 협력보다 높은 수준의 동북아 협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동북아 협력의 제도화는 한중일 국가차원보다는 '환황해경제권' 구상 등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규슈(九州)를 비롯한 지방정부의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정부는 "장차 다가올 동아시아 경제제휴의 제도화를 시야에 넣으면서 (자국이)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될 한중일 3개국의 높은 레벨의 제휴를 동아시아 차원으로 확대한다"(2003년 '통상백서')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여기서 경제권의 지리적 공간은 동아시아로 설정되어 있으며, 한중일 경제협력이 높은 수준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완결된 공동체로서 성립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동북아 경제협력 활동과 동북아 공동체 형성은 동일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일본의 동아시아 경제권 구상은 경제안보를 중시하는 지역관념에서 비롯된다. 일본의 외교정책은 유엔외교, 경제원조(ODA), 대미외교가 주축이지만, 지역으로서는 동아시아가 중요하다. 특히 동남아는 일본의 수출시장이자 원료공급지이며 일본기업의 해외이전지로서 일본의 경제안보에 중요한 지역이다. 이 지역의 경제적 역동성과 정치경제체제의 취약성, 중국의 영향력 확대, 정치군사적 긴장의 상존은 일본의 경제안보적 관심을 끄는 외부 요인이다. 일본의 경제침체와 내수시장의 한계, 국제적 역할에 대한 욕구는 동아시아 경제권의 제도화에 관여하게끔 만드는 내부 요인이다. 두 요인이 작용하여 아세안+3, 한중일 협력과 자유무역협정(FTA)경제협력협정(EPA) 등이 추진되고 있다.
동아시아를 포괄적으로 보는 지역관념에서 동북아지역은 상대화될 수밖에 없다. 동북아 공동체가 구축된다면 경제적 효율성과 이익은 증대될 수 있어도 일본의 지역관념에 중요한 동남아의 경제안보가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일본은 상호경쟁과 견제의 긴장감, 그리고 안보와 역사의 해석을 둘러싼 심리적 갈등이 내포된 동북아공간에 대해 강한 공동체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일본정부는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경제관계를 '렌케이'(連携·연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이 말이 경제안보와 이익에 기반한 경제전략적 개념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시아지역포럼(ARF)에서 보듯이 일본의 동북아 안보협력 구상도 동아시아 안보구상과 맞물려 있다. 한중일의 만남이 아세안을 매개로 성립하는 아세안+3은 동북아 공동체 형성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흔히 동북아공동체 형성을 당연히 여기며 일본에도 그러할 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높은 수준의 경제협력과 지역공동체 형성은 별개의 문제다. '지역의 안정과 번영'은 '일본의 안전과 번영'과 결부되었을 때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동북아 안보에 결부된 상상력을 갖고 동북아공동체를 꿈꾸지만, 일본은 포괄적인 동아시아 지역관념과 경제안보 논리를 갖고 동아시아 경제공간을 상상한다. 우리도 스스로를 동북아 중심으로 설정하는 자기중심적·감성적 공동체론에 집착하기보다는 넓은 시야에서 동아시아 경제공간을 직시하고 지역현실에 대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협찬 : SK주식회사
/장인성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 47세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 도쿄대 학술박사(국제정치학) 저서 "장소의 국제정치사상"(서울대출판부, 2002) 등 다수
■커져가는 中의 입김 견제 日, 아세안에 선물보따리
지난해 12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의 정상들을 도쿄로 초청해 특별회담을 가졌다. 아세안 정상들이 아세안 밖에서 모두 모여 회담을 갖는 것은 역사상 처음일 정도로 형식과 내용면에서 특별하고 이례적인 회의였다.
11, 12일 이틀간의 회담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과 아세안의 연대를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도쿄선언'을 채택했다. 또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통해 아세안 국가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책을 제시하는 등 다양한 선물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와는 별도로 '아세안 우호 및 협력조약'(TAC)에도 서명하는 등 성의를 보였다.
동남아시아는 오래 전부터 일본의 앞마당이었다. 일본은 1960년대 이후 아세안에 대한 엄청난 투자와 지원을 바탕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이처럼 '특별한' 회담까지 개최해 가며 아세안에 접근하려 한 것은 이 지역에서 급속하게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중국이라는 라이벌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최근 눈부신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지역 공략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아세안+3 정상회담에서는 아세안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시기를 앞당기기로 합의하고, 일본이 거부했던 TAC조약도 체결해 호감을 샀다. 결국 발리 회담 한달 뒤에 열린 도쿄 특별회담은 중국의 지역 내 영향력 확대에 대한 일본의 방어적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일본이 그동안 이 지역에 대해 손을 놓고 지낸 것은 아니다. 일본은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아시아의 지역적, 집단적 협력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그래서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정권 시절에는 경제 위기에 빠진 동아시아국가들을 지원하는 '신 미야자와(宮澤) 플랜'을 마련하고, 아시아통화기금(AMF) 구상을 제창하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이 지역에서의 영향력 축소를 꺼리는 미국의 반대와 일본의 리더십 부재, 그리고 중국의 새로운 부상 등의 요인이 일본의 추진력을 떨어뜨렸다.
/김철훈기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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