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사 김언호 사장이 27일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 앞으로 내용증명 등기우편 한 통을 보냈다. 그 속에는 '도서반환 요청서'가 들어 있다. 1980, 90년대 대학생들이 이른바 '의식화' 필수 교재처럼 읽던 '해방전후사의 인식'(약칭 해전사) 제1권 초판본 500여 부를 돌려달라는 내용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이야기는 2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9년 10월 28일. 서울 서대문의 어느 창고 한 칸을 빌려 출판사를 꾸리고 있던 김 사장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당시 문화공보부 출판 담당 공무원인데 급히 보자는 것이었다. 부리나케 지금은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조직위원회가 사용하고 있는 경복궁 내 국립중앙박물관 뒷건물로 달려간 김 사장은 단단히 질책을 당했다.
"친일 좀 했다는 것이 무슨 문제입니까." 그 달 15일 출간된 '해전사' 제1권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으로 계엄령이 선포된 직후여서, 당시 문공부에는 군 관계자까지 나와 출판물을 검열하고 있었다. 문제가 된 것은 책에 실린 친일연구가 임종국(작고) 선생의 '일제 말 친일 군상의 실태'란 논문이었다. 100쪽에 걸쳐 친일파들의 이름을 낱낱이 거론하며 '친일청산이 민족정기를 세우는 중대한 과제'라고 지적한 글이 몹시 못마땅했던 것이다.
계엄사령부에서 파견된 군인과 문공부 담당자는 강압적인 분위기로 김 사장에게 '해전사'를 즉각 회수하도록 명령했다. 이른바 판매금지 조치였다. 회사로 돌아온 그는 남아 있는 '해전사'를 한데 모았다. 초판을 5,000부 찍었는데 보름도 안 되어 4,500권이 팔려나가고, 남은 500부를 다음 날 용달차에 실어 문공부에 갖다 주고 말았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군인이 통치하는 비상시국에서는 불가항력이었습니다."
김 사장은 "책이 당시 문공부 지하창고나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아니면 폐기처분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정부가 부당하게 압수해간 책을 돌려 받겠다는 것은 한 시대 출판문화의 정신을 돌려 받는다는 의미"라며 "어두운 창고에 유폐된 소중한 책을 이제는 자유롭게 해방시켜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번 일을 계기로 독재정권시절 압수당한 수많은 금서들에 대한 반환운동을 동료 출판인들과 추진할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한길사는 이와 함께 그동안 7년여 절판 상태로 있던 해전사 제1권 개정 3판을 냈다. 79년 출판 직후 판금된 책은 80년 '서울의 봄' 시절 계엄사령부의 재검열을 거쳐 출판이 허락됐다. 하지만 그때 임종국 선생의 글과 당시 구속 중이던 임헌영 현 민족문제연구소장의 글을 빼야 했다. 빠진 글들은 표지를 바꿔 89년 개정 1판이 나오면서 모두 복구됐다. 잠시 절판을 거쳐 93년 개정 2판이 나왔고, 이번에 다시 표지를 단장하고 한문투의 말을 우리말로 고쳐 새로 냈다. 역사적인 의미를 살리기 위해 내용은 초판 그대로다.
이미 한국 현대사를 서술한 책으로는 고전 반열에 오른 해전사 제1권은 지금까지 40만권이 팔렸다. 김 사장은 "'한길사상 신서 11번째 권으로 나온 이 책은 민족의 정통성을 세우겠다는 철저히 민족정신에 입각한 책"이라며 "책에 실린 고 송건호 선생의 '해방의 민족사적 인식' 같은 글은 그의 대표 글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말했다. 책에는 진덕규 이화여대 명예교수, 언론인 오익환씨,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김도현 전 문화부 차관, 정치학자 이동화씨, 이종훈 전 중앙대 총장, 염무웅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등의 글이 실려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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