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차지했던 클로드 를루슈의 ‘남과 여’는 한동안 프랑스 영화의 정수이자 세상 모든 예술영화의 대명사로 통했다. ‘남과 여’는 미국 영화의 탁탁 끊어지는 편집과 정반대 스타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카메라가 잡아내는 그 세련된 감정 과잉의 세계가 실은 감상주의의 또 다른 얼굴인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렇더라도 아직까지 ‘남과 여’를 사랑한다. 대단치 않은 남녀의 사랑 얘기지만 그걸 근사하게 바라보고 느끼는 것은 영화의 매력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남과 여’의 클라이맥스 장면. 호텔 레스토랑에서 여주인공과 식사를 하던 남자는 웨이터가 다가오자 한 마디를 내뱉는다. 자리에 앉을 때부터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말이었다. “방 있습니까?” 그때 카메라는 줌으로 뒤로 쑥 빠진다. 등장 인물의 감정 묘사에 카메라가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듯한 이런 스타일이 ‘남과 여’의 예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건 ‘남과 여’ 한 편으로 족했다. 이어진 클로드 를루슈의 영화는 대체로 심심했으며 알맹이가 없었다. 젊은 기분으로 찍을 수 있었던 ‘남과 여’를 나이가 들어서도 변주한다면 좀 질리게 마련이다.
2002년 칸영화제 폐막작이었던 ‘레이디스 앤 젠틀맨’을 보면서 클로드 를루슈는 아직도 이런 얘기를 전과 같은 스타일로 찍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든 남녀 주인공의 쓸쓸한 사랑을 찍은 이 영화에서는, 극중 대사처럼 ‘삶은 잠이며 꿈’인 듯 흘러간다.
사랑하는 그 순간만 빼고는 그렇게 흘러갔으면 좋겠다. 과거를 기억할 수 없으면 상처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 이야기다. 이 영화는. 감상주의와 통찰의 어중간한 경계에서 다소 말랑말랑한 분위기에 젖고 싶을 때 접하고 싶은 그런 영화다.
그와 달리 자신의 몸에 아드레날린이 팍팍 분비되는 것을 느끼고 싶다면 태국 영화 ‘옹박:무에타이의 후예’를 권하겠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오히려 보고 싶은 마음을 반감시킬지 모른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태국의 전통 무술인 무에타이의 고수 토니 자가 연기하는 액션이 천재적인 수준이기 때문이다.
청룽(成龍)의 전성기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놀라움을 느끼게 되는데 액션의 난이도 면에서는 더 높은 것 같다. 무릎과 팔꿈치로 상대의 머리와 가슴을 가격하는 무에타이 특유의 격렬한 액션도 그렇지만 카메라 기교와 특수효과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은 상태에서 벌어지는 추격전의 긴박감이 눈을 휘둥그레 만든다.
일본 애니메이션 ‘퍼펙트 블루’는 제1회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소개됐던 작품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때 극영화와 마찬가지로 애니메이션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는 것을 처음 실감했다. 시간이 꽤 흘러 지각 개봉하는 영화지만 그때 느꼈던 재미가 반감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성과 폭력 묘사를 꽤 도발적으로 펼치는 가운데 연예인의 천국이 된 오늘날 대중 문화 현실에 대해 뭔가 생각하게 해준다.
김영진/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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