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감독의 99번째 영화 ‘하류인생’이 패션가의 화제다. 195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반까지 한국 패션사에서 가장 화려했던 시절의 명동을 고스란히 재현해내서다. 지금은 청담동에 ‘패션 1번지’ 명패를 내줬지만 그 시절 명동은 대한민국 최고의 멋쟁이들이 토해내는 뜨거운 숨결로 충만했다.영화의상을 제작한 패션디자이너 홍승완씨는 “영화 ‘하류인생’은 격변기를 헤쳐간 거친 남자들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옷을 목숨처럼 사랑했던 당대인들의 이야기”라며 “패션으로 쓴 현대사 연대기인 셈”이라고 말했다.
"요즘 패션은 패션도 아니야."- 임권택감독
2003년 여름 어느 날, 임권택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이 홍승완씨의 브랜드인 ‘스위트 리벤지’ 신사동 매장을 찾아왔다. 며칠 뒤 ‘하류인생’ 시나리오가 왔다.
“평소 시대의상에 관심이 많은데다 50,60년대 고급맞춤복 시장의 전성시대를 누렸던 명동이 시나리오의 배경이어서 엄청난 흥미를 느꼈어요. 국내에서 처음 제대로 된 패션디자인이 소개되던 시절의 이야기라 디자이너로서 할 일이 많겠다 싶었죠.”
신문과 여성잡지, 도록, 영화, 장인ㆍ장모의 회고에 제작사인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의 젊은날 사진첩까지 뒤지며 의상 고증작업을 하면서 홍씨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 시대에 이미 모든 패션이 다 나왔더군요. 먹고 살기도 힘들던 시절에 무슨 대단한 디자인이 있었겠냐는 생각은 정말 편견에 불과했어요. 디자인의 종류나 변주 능력도 대단했구요. 소재도 개성적인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요즘 멋쟁이들은 저리가라 싶어요. 임 감독이 그러시더군요. ‘요즘 패션은 패션도 아니야. 그 때는 정말 패션에 목숨을 걸었지’라고요.”
모든 의상은 당대의 산증인 임권택 감독과 현대의 전문가 홍씨의 끊임없는 의견교환을 통해 만들어졌다. 60벌이 새로 제작됐고 기존 ‘스위트 리벤지’ 제품 50벌도 투입됐다.
1960년대 명동- 멋과 낭만의 시대
‘주먹 신화’가 신분상승의 꿈을 달래줬을 뿐, 이렇다할 과시 수단이 없던 시대에 패션은 유일하게 강렬한 아이덴티티를 내보이는 신분증명서 역할을 했다. 멋 좀 낸다, 힘깨나 쓴다는 사람은 누구나 명동으로 몰려들었고 명동의 유명 클럽이나 바에 가려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장을 하는 것이 에티켓이었다. 흰색 양복에 ‘빽구두’면 어디서나 신사 대접을 받았다.
영화속에도 등장하는 ‘송옥양장점’은 유명한 랜드마크였다. 명동에서 만날 약속을 할 땐 으레 “송옥 앞에서 보자”고 했다. 지금 패션몰 유투존의 맞은편이 송옥이 있던 자리. 당시 송옥 건너편 한양장점에서 일했던 원로디자이너 문경희씨는 “당시 남들은 대부분 한평짜리 윈도우가 고작이었지만 송옥은 4평은 됨직한 커다란 전면 윈도우를 갖고있어 명성을 얻었다”고 회고한다. 신흥부자들이나 젊은층에 인기였고 당시 상류층의 고관부인들은 ‘보그’ ‘마드모아젤’ ‘아리사’ ‘노라노’ 등의 양장점을 찾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명품족’은 있었죠. 당시는 밀수가 많아서 돈있는 사람들은 이태리제나 프랑스제, 영국제와 미제 원단을 대서 옷을 맞춰 입었어요. 어찌나 호사스러웠던지, 그때 디자이너 월급이 7,000원이었는데 코트 한벌 맞추면 7만~8만원씩 받았아요. 디자인은 유럽이나 일본에서 두세달전 발행된 여성지들을 들여와 본떴는데 손님 몸매와는 전혀 상관없이 개미허리로 옷모양을 그려주면 다들 만족해서 그 자리에서 옷을 맞췄지요.”
시대는 옷을 만들고 옷은 신사를 만든다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면 영화속에서 시대가 변함에 따라 옷의 디자인도 조금씩 변화하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주인공 조승우가 어린 건달로 명동바닥을 헤집던 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 신사복은 어깨패드가 부드럽고 중간 크기의 라펠에 총장(등판)의 길이가 긴 재킷에 바지통이 넓고 구두 등을 충분히 덮을 만큼 헐렁하고 긴 바지가 유행이었다. 케네디 대통령 시대의 옷차림과 흡사하고 무늬없는 원단이 많이 사용됐다.
6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면 영국신사복의 영향을 받으면서 바지길이는 짧아지고 폭도 좁아지며 재킷도 허리선을 넣어 몸에 밀착되기 시작한다. 라펠은 좁고 소매 진동(겨드랑이 둘레)도 타이트해져서 소매도 좁아졌다. 영국식 모즈룩이 소개되면서 체크무늬 원단이 다채롭게 활용되는 것도 눈여겨 볼 만하다.
70년대 초반으로 들어서면 남성복은 다시 한번 탈바꿈을 한다. 이탈리아 마피아 스타일의 옷들이 유행하면서 라펠과 셔츠깃은 커지고 더블브레스티드 양복에 밑단이 약간 퍼지는 나팔바지, 어깨에 심을 넣어 약간 솟은 듯 표현하는 스타일이 유행. 소재는 얇아지고 광택이 추가됐다. 당시 인기있던 가수 남진이나 나훈아씨가 이런 스타일의 전령사였다.
여성복에서는 잘록한 허리를 강조하고 치마는 패티코트를 넣어 종처럼 부풀렸던 크리스찬 디올의 뉴룩스타일이 60년대 초까지 풍미하다 중반부터는 원통형의 색(sack) 드레스가 인기를 끌었다.
영화와 패션, 접근은 달라도 같은 도달점
홍씨는 영화작업을 하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대목을 “절제와 창조라는 두마리 토끼잡이”라고 말했다.
“컬렉션을 할 때는 나 자신의 감성에 충실하면 되지만 영화는 시대상황과 배우의 캐릭터를 함께 고려해서 같으면서 다른 어떤 것을 창조하는 것이 요구되지요. 나의 주장만 있어도 안되고 그렇다고 끌려다니기만 해서도 안되는 무엇. 패션은 영화적 허구를 완성시키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허구를 현실감있게 만드는 역할도 해야한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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