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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을 깨는 사람들] <9> 한양대 임지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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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을 깨는 사람들] <9> 한양대 임지현 교수

입력
2004.05.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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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인식과 민족주의만큼 우리 국민의 의식을 강하게 지배하는 것도 드물다. 일본의 역사 왜곡을 질타하거나 남북관계를 생각할 때, 또는 월드컵 축구대회나 미군 장갑차 사건 당시의 응원·시위에 이르기까지 많은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좌우한다. 그러나 최근 민족 인식이 한때의 역사적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의식과 학문·지식 발전을 제약하는 '억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민족·민족주의에서 벗어난 역사 인식 싹 틔우기에 바쁜 한양대 사학과 임지현 교수를 만났다.

―민족 기준의 역사 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게 된 동기는.

"유럽사를 전공했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상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80년대에 '마르크스·엥겔스와 민족문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는데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마르크시즘에 매달리면서도 왜 민족 문제는 모두 피해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르크시즘에 조금만 익숙한 사람이라면 '민족은 영원한 실체'라거나 '단군 이래 5,000년을 이어온 단일 민족'이라는 등의 얘기에 당연히 의문을 느껴야 했다. 역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한국 사회의 민족 담론이 세계사적 상식과 동떨어졌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우리나라에서 민족 개념이 등장한 것은 언제쯤인가.

"사람의 생각은 언어에 투영된다. 우리나라에서는 1904년께부터 비로소 민족이란 말이 쓰였다.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의 '네이션'(Nation)을 '민족'(民族)이라는 한자어로 번역했고, 그 말이 그대로 들어왔다. 혈연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는 '동포'(同胞)라는 말도 외세의 압박이 시작된 구한말부터 쓰이기 시작했을 뿐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피아(彼我) 구분은 인식의 출발점 아닌가.

"그런 구분은 늘 있었지만 그 기준이 민족은 아니었다. 민족 단위로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것은 시민적 평등, 즉 법 앞의 평등이 이뤄진 다음에나 가능하다. 조선시대의 양반과 상민이 우리라는 생각을 할 순 없었고, '우리 상놈, 저들 양반'이라는 인식만 있었다. 신분제 해체 이후에야 우리 조선 사람, 저들 일본인의 구분이 가능해졌다."

―수많은 민족 전쟁과 항쟁의 기록은 무엇인가.

"그것이 대표적인 거짓 역사다. 임진왜란 때 오희문(吳希文)이 쓴 '쇄미록'(쁈尾錄)에는 의병장이 의병을 모으는 데 상민들이 호응하지 않고, 쌀을 나눠주는 등 유화책을 쓰는 왜병을 오히려 환영한다는 내용이 있다. 고려의 대몽 항쟁기에도 마찬가지였다. 1253년 몽골의 5차 침입 때 벌어진 충주성 전투는 관민이 합심해 싸운 대표적 전투라지만 실은 노비와 천민의 가세는 승장(僧將) 김윤후(金允侯)가 노비문서를 불태운 후의 일이다. 그 전에는 투항자가 속출했다. 초기에 일반 민중의 대몽 항전은 몽골군의 초토화 전술로부터 삶의 기반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네이션'(Nation)이 아니라 '폴리티'(Polity·정체)가 전쟁의 주체였다."

―원래 서구의 '네이션'은 어떤 개념인가.

"근대 국민국가 성립과정에서 나온 서구의 '네이션'은 혈통이나 문화전통의 공통성보다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겠다는 주관적 의지를 중시했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의 무대인 알사스 로렌 지방이 좋은 예다. 프랑스혁명(1789∼1794년) 당시만 해도 주민들은 독일어를 썼고, 문화 전통도 독일과 가까웠다. 그런데 소설의 배경인 1870년 보불전쟁 때에 이르면 프랑스 민족 의식이 뿌리내릴 정도로 10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완전히 탈바꿈했다. 프랑스 혁명 직후 주민투표를 통해 귀속 국가를 결정했는데 독일을 선택하면 봉건제로 후퇴하고, 프랑스를 택하면 시민혁명의 성과를 누릴 수 있었으니 당연히 프랑스를 택했다."

―우리가 혈통·문화 공통성을 강조하게 된 까닭은.

"일본은 근대화를 위한 국민 동원의 수단으로 민족적 일체성을 강조했고, 그런 인식이 말과 함께 그대로 들어왔다. 민족주의가 본질적으로 배타적이지만 혈통을 강조하면 더욱 그렇다. 일제 식민지 지배라는 상황은 '저항'과 '혈통'을 자연스럽게 결합시켰다."

―그것이 어떻게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었나.

"박정희(朴正熙) 시대를 빼고 생각하기 어렵다. 민족주의는 늘 국가 권력이 민중을 동원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였다.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박정희 향수'는 단순히 현재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했다기보다 근본적으로 역사적 기억·평가가 긍정적으로 형성된 결과이다. 독재자에 대한 기억이 긍정적으로 형성된 데는 민족주의 담론의 영향이 크다. 박정희는 조국·민족 근대화를 위해 소아(小我)를 버리고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역설했다. 실제 파업으로 인한 노동 손실이 필리핀의 10분의 1밖에 안 됐다. 엄격하게 금지된 측면도 있지만 어느 정도 노동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는 장치가 있었다. 순전히 강제로만 했다면 사회적 기억이 좋을 수가 없다. 독일이나 이탈리아도 비슷하다. 1951년 서독에서 행해진 여론조사에서 51%가 히틀러 시대를 가장 좋았던 시기라고 답했다. 서독 국민의 그런 기억은 히틀러의 노동자 복지 정책 때문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히틀러의 '민족 공동체' 논리를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도 구술사를 통해 본 무솔리니 시대의 기억은 대단히 긍정적이다. '고대 로마제국의 영광을 되찾자'는 민족주의 담론이 먹혔다."

―그런 호소력의 원천은.

"민족주의는 항상 우리와 저들을 나누며, 소수파인 아웃사이더에 대한 위협을 통해 다수파인 인사이더에게 주류에 속한 안도감을 준다. 히틀러가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정신병자, 장애인을 아웃사이더로 설정했다면 박정희는 빨갱이와 화교를 아웃사이더로 몰았다."

―당시 민족 의식 강화를 위한 구체적 장치가 있었나.

"해방 후 미 군정이 도입한 혁신주의 교육과정의 '교수요령'은 교육의 목표를 '건강한 시민 육성'에 두었고, 역사 교육은 먼 나라, 이웃나라, 우리나라 순으로 이뤄졌다. 그것이 이어지다가 박정희 집권 후인 1963년 교육과정 개편에서 민족주체성, 민족교육 이야기가 나왔고, 68년 국민교육헌장이 나오면서 민족주의 교육이 절정으로 치달았다. 69년의 3선 개헌과 72년 '10월 유신' 사이에 서울대 사학과가 국사학과, 서양사학과, 동양사학과로 쪼개졌다. 또 천마총 등 역사 유적의 대대적 발굴과 이순신을 비롯한 역사 인물의 민족영웅화 작업이 동시에 진행됐다."

―민족주의의 역사적 정당성도 있지 않나.

"구한말에서 해방 직후까지는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가진다. 제국과 식민지라는 분명한 상황이 있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는 그 효용이 끝났는데도 분단을 구실로 남북 양쪽이 체제 강화와 동원의 수단으로 이를 유지, 강화해 왔다. 더욱이 일제 시대의 저항 민족주의조차 억압의 논리를 잉태하고 있었다. 일제가 다산을 장려하자 우리 여성 지도자들은 출산 통제론을 주장하고 나섰는데 교육 수준이 높고, 신체 조건이 좋은 여성은 아이를 많이 낳고, 무식하고 신체적으로 열등한 여성은 낳지 말라는 식의 우생학적 사고를 드러냈다. 저항 민족주의라고 무조건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면 이런 억압성을 외면하게 된다."

―민족 의식에 근거한 역사 인식의 문제점은.

"역사를 사실이 아니라 신화로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의 국민국가를 오랜 실체로 인정하고, 국민국가의 완성이라는 역사의 과제를 내건 다음 거기에 맞추어 과거를 살핀 후 다시 국민국가의 완성을 역사적 사명으로 삼는 순환론에 빠진다. 그런 역사 인식은 미래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도 막는다. 대표적인 예가 통일 논의다. 너도 나도 통일을 '민족적 과제'라고 얘기하지만 통일된 한반도의 미래상이 분명하지 않다. 우리의 목표는 통일이 아니라 한반도 주민들의 행복한 삶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통일이 그런 행복을 가져온다면 해야 하고, 어떤 통일이 거기에 적합한지를 논의해야 한다. 행복한 삶에 통일이 필요하지 않다면 통일국가 구상 대신 탈대결, 평화공존, 좋은 이웃나라의 길을 모색하면 된다."

―일본 역사교과서 파동에서 보듯 민족주의는 상대적인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적대적 공범 관계'라는 말을 쓴다. 한일 관계를 예로 들면 한국 민족주의가 일본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일본 민족주의가 한국 민족주의를 강화한다. 양쪽에서 동시에 노력해야 적대적 공범 관계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넘어야 할 산이 많은데….

"일반 국민의 인식 변화는 요원하다. 역사교육을 맡은 교사들의 인식 전환이 시급한데 진보적 교사단체조차도 민족 문제에는 교조적이다. 그러나 10년 전만 해도 '민족주의는 절대선'이라던 사람들이 이제는 '좋은 민족주의'와 '나쁜 민족주의'를 가르는 등 변화의 틈새는 열렸다."

황영식 편집위원 yshwang@hk.co.kr

● 약 력

1959년 서울, 45세

서강대 사학과

서강대 사학과 석사, 박사

한양대 사학과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

폴란드 바르샤바대 초청교수

역사비평·당대비평 편집위원

저서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우리 안의 파시즘'(공저) '오만과 편견'(대담집) '바르샤바에서 보낸 편지' '이념의 속살'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공저) 등

● 옛 문헌을 뒤져보니…

우리 옛 문헌에서 혹시라도 '민족'이란 말을 썼는지를 삼국사기와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CD롬으로 검색해 보았다. 한자 원문과 한글 번역문의 동시 검색이 가능한 삼국사기와 고려사에는 민족이란 말이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한글판이 세종실록 3회, 연산일기와 중종실록, 숙종실록 각 1회씩 모두 여섯 번 민족이란 말을 쓰고 있었으나 원문과 대조해 본 결과 '우리 민족이 아니다'는 표현은 '비아족류'(非我族類)를, '다른 민족'은 '이류'(異類), '우리 민족'은 '아인민'(我人民)을 각각 옮긴 말이었다.

한편 1896∼1899년에 발행된 독립신문에도 민족이란 말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1904∼1910년에 발행된 대한매일신보에는 민족이란 말이 177회나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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