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문화 수출은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그 나라의 포용력과 비례한다."월드뮤직 시리즈를 내고 있는 한 음반사 관계자가 한 말이다. 우리나라 전통음악을 외국에 알리는 게 소원이라는 그는 "세계의 다양한 음악과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다음에라야, 우리 문화의 수출 길도 넓어질 것" 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남의 문화는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우리 것의 소중함만 강조해서야 어디 장사를 할 수 있겠나. 또 외국 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힘 세고 잘 사는 몇몇 나라의 것만 주목할 뿐 세계의 변방, 그러나 실은 세계 문화의 실핏줄 또는 거대한 뿌리를 제공하고 있는 지역에는 눈도 돌리지 않는 문화적 편식으로는 세계화 시대의 참된 코스모폴리탄적 시야를 얻기 어렵다.
파리나 베를린, 뉴욕 등 오늘날 세계 문화의 중심지가 되고 있는 도시들은 모두 온갖 인종과 민족, 문화가 뒤섞여 공존하는 개방성이 특징이다. 반면 인구 1,000만명의 거대 도시 서울은 여전히 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의 문화만 집중적으로 소비하는 편협함을 보이고 있다. 최근 들어 월드뮤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등 긍정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지구는 분명 넓고 둥근데, 우리가 즐기는 음악이며 문화는 얼마나 좁고 모난 것인가.
흔히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문화적 다양성이 자리잡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적인 것은 한국적인 것에 그칠 뿐이다. 그리하여 국악 등 전통예술은 세계무대에서 변방을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 문화가 전세계와 통하려면, 먼저 우리 자신의 경험을 세계로 확대하고 거기에 맞춰 좀 더 보편적인 지평에서 우리 고유의 유산을 재해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윤이상의 오페라 '심청'을 보자. 우리가 아는 심청은 아버지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진 효녀 이야기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잔인하고 무지한 인신매매의 끔찍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오페라 '심청'의 대본작가 하랄트 쿤츠는 심청을 이기심에 눈먼 자를 구원하는 거룩한 희생의 드라마로 재창조함으로써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이러한 발상의 전환은 경직되고 협소한 '우물 안 개구리' 식 사고로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밖으로 나가려면 우리가 먼저 문을 열어야 한다.
오미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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