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문민정부 출범 이후 우리 사회에 만연된 부정부패를 없애기 위해 기존의 사정기관을 총괄하는 대통령 직속 부정방지위원회의 설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그러나 이렇게 설치하면 옥상옥(屋上屋)이 돼 감사원 검찰 경찰 등 기존 사정기관의 정상적인 활동을 제약할 우려가 있다는 의견이 있어, 이를 조정한 결과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부정방지대책위원회가 감사원장의 자문기구로 설치되었다.하루는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 사무실로 감사위원 황우려(黃祐呂·현 한나라당 의원)씨가 찾아왔다. 나를 이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하려 한다면서 감사원장이 직접 만나 얘기할 것이라고 했다. 이틀 뒤 약속 장소인 코리아나 호텔 3층으로 나갔더니 이시윤(李時潤) 감사원장과 황 위원이 나를 맞이했다. 이 원장이 부정방지위원회의 목적과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나더러 위원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나는 적임자가 아니라고 답하고 사양했으나 두 분이 거듭 간청해 위원장을 맡기로 했다. 1995년 3월 나는 이 위원회의 제2대 위원장에 취임해 97년 2월까지 2년 동안 일했다.
위원회는 그 해 8월 금융부조리실태 및 방지대책을 시작으로 97년 말까지 세무 경찰 건설 건축 관련 부조리 실태 및 방지대책과 자체감사 활성화방안 등에 대한 정책 건의 보고서 30권을 발간하였다. 건의사항은 모두 550건에 달했다. 감사원장은 위원회의 건의 내용 중 국가정책에 반영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는 주요사항은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감사업무에 활용할 사항은 각 국·과에 지시하여 실천했다.
김 대통령은 위원회의 활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위원들을 여러 번 청와대로 초청, 보고를 직접 듣기도 하고 격려도 해주었다. 그러면서 때때로 나를 따로 불러서 단독으로 여러 번 가서 오찬도 하고 이야기를 할 기회도 갖게 됐다. 김 대통령은 솔직하고 소탈한 면이 많아 대화가 편하고 아주 친근한 분위기를 잘 만들었다. 한번은 남북관계가 화제가 됐는데 김 대통령은 "북한 체제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북한 지도자들의 빨치산 경력이나 이념과 사상, 지도력의 형성과정 등을 볼 때 그리 간단하게 볼 수 없다"고 했는데, 김 대통령은 "내가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서 남북관계를 비교적 낙관적으로 보았다.
위원장을 한 지 1년쯤 됐을 때였다. 김 대통령이 나를 보자고 해 집무실로 가니 차를 나누면서 "서 위원장, 이번 총선에 전국구 의원으로 나가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하는 말이었지만 나는 "정치할 사람이 못 된다. 내가 국회의원을 해도 김 대통령께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지금 부정방지대책위원장을 하면서 도와드리고 있지 않는가"라고 사양했다. 그러자 김 대통령은 "그러면 제일 믿을 만한 사람을 한 두 사람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고건(高建)씨와 이세중(李世中)씨를 추천하고 "깨끗하고 능력 있는 분이니 나보다 훨씬 나을 것"이라고 했다. 김 대통령은 나보고 "그러면 가서 두 사람에게 권고해달라"고 했고 나는 "자신 있다"고 했다. 며칠 후 두 사람을 따로따로 만나 "적임이니 꼭 좀 하시오"라고 부탁했다. 두 사람은 일단 수긍을 하면서 "생각해보겠다"고 했고 며칠 후에 김 대통령도 만났다. 그러나 고건씨는 그 부친께서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고, 이세중씨도 나이 많으신 모친께서 걱정을 해서 사양했다고 했다. 그래서 이 일은 결국 실현이 안 됐다.
내가 재임할 당시 부위원장으로 일한 권태준(權泰埈) 서울대 교수와 허영(許營) 이동(李棟) 이은영(李銀榮) 김창국(金昌國) 위원 등의 활동이 돋보였고 나와 가까워졌다. 특히 권태준 교수는 우수한 이론가로 내 뒤를 이어 위원장을 했고, 정계에 나가도 될 분인데 조용히 지내는 것 같아 아쉽다.
이 위원회는 또 조사 연구 외에도 캠페인, 공개토론회 등 다양한 부정부패추방운동을 했으나 감사원장 자문기구라는 한계 때문에 보다 더 필요하고 중요한 활동을 하지 못한 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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