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은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발렌시아 등 세계적인 명문클럽을 가장 많이 보유한 축구 강국이지만 월드컵에서의 성적은 좋지 않았다. 지금까지 모두 11차례 본선에 올랐는데 1952년 브라질대회서 4강에 오른 게 최고 성적이고, 98년 프랑스대회 땐 16강 탈락의 수모도 겪었다.그러나 다른 나라와 달리, 나쁜 성적 때문에 국가대표팀이 공항에서 팬들로부터 계란·토마토 세례를 받는 일은 없다. 여론 역시 대표팀에 일방적인 비난을 퍼붓지는 않는다. 마침 90년대 중반 스페인 취재 길에 한 교민으로부터 '팬들이 대표팀에 관대한 이유'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스페인은 대표팀을 뽑는 기술위원회에 팬들의 대표가 참석합니다. 말하자면 대표선수 선발을 팬들에게 공인 받는 것이지요. 그러니 팬들로서도 대표팀의 성적부진에 대해 불만을 터뜨릴 이유가 없지요."
그의 답변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무릎을 탁 쳤다. 대표팀에 대한 과도한 기대에서 생길 수 있는 미연의 사태를 나름대로 예방하는 스페인 팬들의 현명함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스페인의 축구열기가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덜한 것이 아니다. 광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그 광적인 열기 이면에는 지역주의를 바탕으로 한 경쟁과 대결의식이 깔려 있다. 스페인은 지역마다 문화와 역사가 크게 다르다. 특히 독자적인 언어를 쓰고 자체 대표팀까지 구성하는 카탈루냐 지역의 바르셀로나와 수도팀 레알 마드리드의 치열한 경쟁은 도가 지나칠 정도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대립이 지역간의 유혈충돌로 비화되는 일은 없다. 오히려 축구발전에 도움을 주고 국민의 갈등을 자연스럽게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사실 근대축구는 클럽축구에서 시작했다. 1860년대 태동한 잉글랜드의 축구클럽들은 1871년 역사적인 축구협회(FA)컵을 출범시켰다. 1904년 국제축구연맹(FIFA)이 결성되기까지 축구는 전 유럽에 전파돼 이미 프로화가 거의 완료되고 있었다. 말하자면 축구는 국가보다는 자신의 연고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스포츠이고, 이것이 바로 축구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이유이다.
그러나 우리축구의 구조는 늘 대표팀축구가 프로축구보다 상위에 있다. 평소 축구에 관심 없는 사람들도 대표팀 경기가 열릴 때는 열성팬이 된다. 행여 경기내용이 좋지 않으면 온 나라가 시끄럽다. 90년대 이후만도 크라머 박종환 차범근 허정무 코엘류 등 5명이나 대표팀 감독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대표팀 편중의 축구사랑에는 부정적인 후유증이 많다는 것이다.
지금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회가 대표팀 감독선임을 놓고 유례없이 여러 후보를 대상으로 면담과 검증작업을 하는 등 야단법석(?)을 떠는 것도 그 일례다. 허나 이렇게 한다고 해서 '제2의 히딩크'가 나올 수 있다고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2002월드컵 4강은 물론 히딩크가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당시 국민의 열성적인 응원과 심판의 판정 등 홈그라운드의 이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월드컵 4강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보다는 차제에 대표축구가 발전할 수 있도록 기초를 다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 프로축구는 대표축구의 젖줄이다. 프로축구의 발전 없이 대표축구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제대로 먹이지 않은 아이가 잘 자라길 바라는 것과 같다. 그리고 프로축구를 살리는 것은 바로 팬들의 사랑이다. /유승근 체육부장 us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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