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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진의 방송보기] 오락에 교양을 강요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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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진의 방송보기] 오락에 교양을 강요하지 마라

입력
2004.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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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전통이란 참 무시하기 어렵다. 아무리 교통과 네트워크가 발달해서 지구촌을 이루더라도, 동양과 서양이 여전히 다르고 서울과 제주가 다른 이유는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다른 이야기를 듣고 다른 모습을 보며 자라왔기 때문일 것이다.그래서인가. 유교문화를 빼놓고 우리나라를 이야기하기는 참 어렵다. 충성과 효도와 신의를 강조하는 전통은 여전히 우리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으니. 그뿐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점잖다. 예의를 존중하고 학문을 숭상한다. 재주보다 성실을 강조하고 말보다는 글을 높이 여긴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대한 공식적인 담론 안에 있다 보면 유교적 숭문주의를 떠올릴 때가 많다. 웃고 떠들다가도 부모나 선생님 앞에서는 조신해지듯, 코미디를 보면서 박장대소하다가도 돌아서서는 '배울게 없다'며 점잖아지는 것이다. 웃고 즐기자는데도, 여전히 그 안에 교양과 품위와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그게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 역시 역사와 전통 탓인지 모르겠다.

우리 역사 속의 방송은 오락매체의 옷을 입은 목적지향적 미디어였다. 미국의 상업주의적 미디어구조를 빌려왔으면서도 내용적으로는 라디오를 통해 새마을운동을 하고 텔레비전을 통해 반공과 유신과 선진조국을 설파했다. '공영성 강화'도 한국방송공사가 설립된 후 30여년간 수없이 반복된 구호이다. 프로그램 개편 때마다, 사장이 바뀔 때마다, 심지어는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텔레비전을 통한 지식과 교양의 제공이라는 탄탄한 원칙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오락 프로그램은 한국 방송 역사에서 '죄인' 역할을 맡아야 했다. 어수선한 시절만 되면 오락 프로그램은 잘려야 했고, 시청률이 높아도 괜히 떳떳하지 못했다. 국민 걱정하는 높은 분들과 교양 있는 엘리트들은 언제나 '저질' 오락 프로그램은 가치가 없고 불손하다며 비판했다.

소위 '에듀테인먼트'를 표방하거나 '지식이 있는 오락'을 강조하는 최근의 오락 프로그램들도 사실상 이 같은 비판의 그늘에 있는 셈이다. 얼마 전 종영한 MBC '!느낌표'는 오락과 교양을 적절히 결합한 대표적 프로그램으로 온갖 상을 받았다. 그렇다면 KBS '대한민국 1교시'나 '비타민' 역시 오락 프로그램이 가야 할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교양을 위해 오락을 희생해도 된다는(아니, 그래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진짜' 즐거움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느낌표'가 좋은 프로그램이었던 이유는 오락과 교양을 잘 결합시켰기 때문이 아니다. 새로운 종류의 즐거움을 만들어낸 '잘 만든' 오락물이기 때문이다. 정서적 공감대를 만들고 시청자로 하여금 그 안에서 희열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지, 아시아의 역사나 건강해지는 법을 가르쳤기 때문이 아니다.

오락 프로그램이 재미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아서는 안된다. 어설픈 계몽주의적 비판도 없어져야 하겠지만, 여기에 시달린 나머지 교양과 지식에 집착해서도 안된다. 텔레비전을 통해 값싸고 편하게 '즐거움'을 느끼고자 하는 다수의 시청자들에게 무지를 일깨워주고자 노력해서는 안된다. 교양과 지식은 선이고 오락은 악이라는 전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까. 시청자를 즐겁게 해주는 오락물들이 인류 평화의 유지나 삶의 질 향상을 위협하는 장애물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윤태진/연세대 영상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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