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니스 前국가대표 유진선86년 서울 아시안게임 테니스는 유진선을 위한 잔치였다. 185㎝ 84㎏의 거구에 파워와 유연성을 겸비한 그는 캐넌서브에 이어 네트를 빈틈없이 장악하는, 동양선수로서는 보기 힘든 화려한 플레이를 펼쳤다.
단체전과 단식 복식 혼합복식 4관왕. 특히 김봉수와 짝을 이뤄 중국과 4시간에 걸쳐 혈전을 벌인 끝에 2―1로 역전승한 남자복식 결승전은 마지막 3세트가 17―15까지 간 국내 테니스 사상 최고의 명승부였다.
그러나 4년 후 베이징대회에서 한국은 은메달 2개밖에 못 따는 참패를 당하며 몰락했다.
유진선도 다음해 은퇴했다. 일반적인 스타에 따라 붙는 구설수라기에는 훨씬 도가 넘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이후 유진선은 테니스 무대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영원한 아웃사이더'라는 자신의 말처럼.
한국테니스 최고 전성기인 80년대를 함께 뛰었던 40대 초반의 선후배들이 실업 대학팀과 대표팀을 맡고 있는 지금도 그는 외곽을 맴돌고 있다.
유진선(42)은 "시기와 모함이 난무하는 테니스계 풍토에 대한 환멸 때문"이라며 그 동안 나돈 악성 소문들을 조목조목 해명했다.
'유진선은 돈밖에 모른다'고 하지만 돈 없는 어린 선수들을 무료로 가르쳐 유망선수로 키우고 외국 전지훈련도 시켰다.
'유진선은 여자 때문에 망쳤다'고 한다. 은퇴식에 온 여성(모델)을 두고 '그 여자 때문에 이혼을 했다'는 말이 돌았으나 그는 스폰서인 국산라켓회사 사장의 딸로 아버지 대신 선물을 갖고 왔던 것인데 이를 주위에서 부풀렸다.
'자기밖에 모르고 선배에 대든다'고 하는데 스포츠인은 청렴 결백하고 배짱과 소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0년간 대표생활을 하면서 체육계의 암투와 비굴함을 수없이 목격했다.
'여자가 생겨 이혼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자라온 환경의 차이 때문이었다. 아내는 둘이 외국에 나가 공부하자고 했으나 어머니가 외국 가서 사는 걸 싫어 하셨다. 시골 출신인 나는 마마보이에 가까울 정도로 어머니를 극진하게 사랑하고 뜻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에 떠날 수 없었는데 이것이 갈등이 깊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91년 은퇴 후 '그 동안 고생했으니 실컷 놀아보자'며 배낭 메고 혼자 미국 캐나다 호주 유럽 동남아 등 많은 곳을 돌아다녔어요. 그러던 중 방송에서 제의가 들어왔죠. KBS의 '별난 세상 별난 사람'을 진행하면서 새로운 경험에 짜릿했어요. 명인을 찾아 배우는 코너에서 빙벽 타는 사람 등 어려워도 자기 길을 꿋꿋이 가는 사람을 보고 '나는 남의 인정을 받으면서 호강하고 투정하며 살았다'고 반성했어요."
이후 암벽타기 빙벽타기 철인3종 등에 도전하며 자신과 사투를 벌이고, 방송 4년 만에 '이제 나도 인간으로서 성숙해져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선수를 키울 생각을 했다고.
그러나 집까지 가까이 옮겨 무보수로 가르치며 미국 프로무대까지 같이 가려 했던 선수가 배신한데 충격을 받아 다시 한국을 떠났다.
이후 캐나다 밴쿠버의 스포츠센터에서 일을 하고 잠깐 귀국했다가 최부길 전 대표팀 감독의 강습에 참여, 미국대학에 테니스 장학생으로 입학한 장서재와 국내 유망주가 된 김소정 김수진 등 10여 명을 만나 호주 동남아 등에 데리고 다니며 훈련시켰다.
2002년부터 2년간은 중국 대표선수들의 유럽 투어를 맡았다.
그는 최근 일본 프로들을 지도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국내에 정착, 본격적인 선수육성에 나서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 준비단계로 테니스를 아끼는 사회 저명인사들을 중심으로 후원그룹을 구성하는 중이다. 그리고 곧 이들과 함께 실내테니스코트를 건립, 최고의 시설에서 최고의 선수를 만들어 보겠다는 게 유진선의 포부이다.
유석근 편집위원 sky@hk.co.kr
■1972년 6월2일/펠레 내한경기… 편파 판정탓 묘기 실종
펠레가 세계적 축구명문인 브라질 산토스팀을 이끌고 서울에 왔다. 당시 31세.
'축구황제' '흑진주' '검은 마술사' 등 숱한 별명을 가진 그는 58년부터 월드컵에 네 차례 출전, 세 차례(58, 62, 70년)나 브라질에 우승을 안겨 준 인기 절정의 스타였다.
국가대표 유니폼을 벗은 지 1년이 된 그는 소속팀 산토스의 첫 극동 원정에 참여, 일본대표를 3―0, 홍콩대표를 4―0으로 꺾고 한국대표팀 상비군과 경기를 가졌다.
산토스에 3만 달러를 지불한 대한축구협회는 수용능력 2만5,000명의 서울(동대문)운동장에 3만5,000명을 입장시켜 1만명이 넘는 인원이 스탠드 아래 그라운드까지 내려와 관전토록 했다.
경기는 산토스가 2―0으로 리드하다 후반 차범근 이회택의 질풍 같은 역습골로 타이가 됐으나 결국 산토스의 3―2 승리로 끝났다. 펠레는 1골을 넣어 자신의 통산 1,204번째 득점을 기록.
그러나 관중들은 펠레가 2중 3중의 집중 마크를 당하고 주심이 편파적으로 산토스팀에게 많은 파울을 선언, 경기의 리듬을 깨는 바람에 펠레의 묘기를 제대로 못 본 아쉬움이 컸다.
펠레는 경기 후 "아시아 축구의 낙후성은 심판에 원인이 있다"고 꼬집기도 했다.
■1973년 5월28일/차범근 결승골… 74월드컵 예선 "이"꺾어
74년 서독월드컵 아시아 A지역 예선이 서울에서 열렸다. 7개국 중 최강은 70년 멕시코월드컵에 아시아 아프리카 대표로 출전했던 이스라엘.
역시 결승에서는 한국과 이스라엘이 맞섰다. 준결에서 한국은 홍콩을 3―0, 이스라엘은 가마모토의 일본을 연장전 끝에 1―0으로 제압했다.
결승전의 예상은 6―4 또는 7―3으로 이스라엘의 우세.
입추의 여지없이 스탠드를 메운 관중들의 함성속에 경기가 시작되자 한국선수들이 맹렬한 태클로 상대의 기를 꺾으며 주도권을 잡았다. 전후반 슈팅수도 10―5로 한국이 우세.
그러나 90분간의 치열한 육탄전이 득점없이 끝나고 연장전 전반도 그대로 흘러가 양팀은 멤버를 교체하며 승부차기 준비에 들어갔으나 종료 11분전, 천금 같은 한국의 골이 터졌다.
왼쪽 코너에서 얻은 프리킥을 박영태가 문전으로 높이 띄운 것을 김기효가 슛, 크로스바를 때리고 나오자 차범근이 왼발 논스톱 슛으로 그물을 갈랐다. 그러나 첫 관문을 통과한 것일 뿐이었다.
한국의 승리 소식에 최종예선 상대가 될 호주는 미소를 지었다.
원정 1차전을 0―0으로 비긴 한국은 서울 2차전에서 김재한 고재욱의 골로 2―0으로 앞서다가 통한의 연속 골을 허용, 2―2가 되었고 제3국 홍콩의 3차전에서 0―1로 져 손 안에 들어왔던 티켓을 놓치고 말았다.
■1989년 5월 28일/백인철 챔프에… 챔피언 6명 "복싱 전성기"
전남 여천에서 벌어진 늙은 여우 풀헨시오 오벨메이아스(36· 베네수엘라)와의 WBA 슈퍼미들급 타이틀전. 28세의 백인철은 노회한 챔피언을 11회 KO로 눕히고 박종팔이 빼앗긴 타이틀을 1년 5일 만에 되찾아 왔다.
오벨메이아스는 박종팔과의 경기에서 갈비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입은 후 계속 방어전을 기피해 WBA로부터 박탈 경고를 받은 상태.
백인철은 소극적으로 나오는 오벨메이아스를 체력을 앞세워 초반부터 적극 공격, 8회 왼손훅을 안면에 터뜨리고 첫 다운을 뺏었다. 이후도 일방적으로 몰아 붙이다 11회 오른손 훅으로 두 번 다운을 추가한 도전자는 비틀거리며 일어난 챔피언에게 양훅을 몰아쳐 1분 21초에 끝냈다.
87년 1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줄리안 잭슨(버진군도)과 WBA 주니어미들급 챔피언결정전을 벌여 3회 TKO패했던 백인철이 마침내 1년 반 만의 재도전에 성공함으로써 한국복싱은 멕시코(7명) 다음으로 많은 6명의 WBA WBC 챔피언을 보유, 최전성기를 맞았다.
중량급으로는 WBA 주니어 미들급의 김기수 유제두와 슈퍼미들급 타이틀을 오벨메이아스에게 잃었던 박종팔에 이어 4번째 챔피언.
이 경기서 1,500만원을 받은 백인철은 론 에세트(미국), 다지마 요시아키(일본)를 물리치고 90년 3월 프랑스에서 크리스토프 티오조를 상대로 한 3차 방어전에서는 2억4,000만원의 최고 대전료를 받았으나 TKO로 타이틀을 내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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