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5월26일 언론인 홍승면이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작고했다. 56세였다. 홍승면은 서울대 사회학과에 재학 중이던 1949년 합동통신사 기자로 언론계에 뛰어들었다. 대학 졸업 뒤인 1955년 한국일보사에 입사해 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지냈고, 1962년에 동아일보사로 자리를 옮겨 역시 논설위원과 편집국장을 지냈다. 홍승면이 한국일보 편집국장이 된 것이 31세 때였으니, 그 시절 신문사 편집 간부들의 연령대가 지금보다 썩 낮았다는 것을 고려해도 파격이었던 셈이다.신문기사의 형식을 거칠게 보도와 논평으로 나눌 수 있다면, 홍승면의 기사는 주로 논평에 속했다. 젊은 나이에 편집 간부와 논설위원이 되는 바람에 사건 현장에 붙박여 있을 시간이 별로 없었던 탓이다. 홍승면의 칼럼들은 한국 신문 문장을 혁신했다고 평가된다. 신문기자 출신의 언론학자 최정호의 말을 훔치자면, "홍승면과 함께 신문 문장의 '누벨바그'가, 한글 세대를 맞는 '뉴저널리즘'의 물결이 시작되었다." '문어의 글'이 아직도 신문 문장을 지배하고 있을 때 홍승면은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지껄이고 주고받는 말만으로, 온전히 '구어의 글' '말의 글'로 신문 칼럼을 썼다는 것이 최정호의 견해다. 1950년대 말부터 7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일보 '지평선' '메아리'난과 동아일보 '횡설수설'난에는 그 '누벨바그'와 '뉴저널리즘'의 문장들이 점점이 박혀있다.
홍승면의 문장이 아직 충분히 구어에 이르지 못했던 1960년 5월26일자 '지평선' 한 대목. "대다수 국민들이 끼니를 못 끓이고 노두(路頭)에 방황할 때에 그들 정치인들은 국재(國財)를 도둑질하고 이권을 농단하여 궁사극치(窮奢極致)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국민의 분노는 그만 형(刑)으로는 그들의 도천(滔天)의 죄악을 응징하기에 불합하니 더 중대한 엄단을 하여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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