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그걸 그냥 뒀단 말이야? 묵사발을 내버리고 말지." "아이구, 묵도 묵 나름이쥬."어린시절, 위의 논도 물이 부족해 애가 타는데 오밤중에 몰래 나와 아래 논으로 물꼬를 터가는 마을의 어느 벽창호를 두고 어른들은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묵도 묵 나름이라는 말은 그 묵은 맛이 없어 숟가락도 내밀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지난 주 원주에 있는 토지문화관을 다녀왔다. 그곳 문화관 아래에 옛날식으로 메밀묵을 파는 집이 있었다. 묵을 굵은 채처럼 썰어 양념장에 물과 함께 후루룩 말아먹는 집이었다. 나는 오랜 만에 대하는 음식이라 반가운데, 고향 선배는 영 탐탁찮은 모양이었다. 왜 그러냐니까 "도시 메밀이란 밥이 되기엔 어느 때에도 부족하고, 간식으로는 또 늘 넘쳐서 지겨운 음식"이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헤어져 돌아오는 길 위에서야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세월의 뜻을 알았다. 그 선배야말로 대관령 아래 오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밥이 되기엔 어느 때에도 부족한' 메밀묵을 늘 밥 삼아 먹으며 자랐던 것이다. "형, 나중에 만나면 그땐 우리 밥 먹어요." 나는 뒤늦게 선배의 어린시절을 위로하듯 길 위에서 밥 약속을 했다.
이순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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