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과 재계 총수를 비롯한 대기업 대표 18명은 25일 오후 3시부터 청와대에서 3시간 15분 동안 경제 활력 회복 방안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했다. 심각한 경기 침체를 반영하듯 당초 예정된 1시간 30분을 2배 이상 초과한 대화였다. 노 대통령은 과감한 규제 완화 등의 경제 활성화 대책을 내놓았고 15개 대기업들은 올 투자규모를 46조원으로 대폭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출자총액 제한의 관철 등 시장 개혁 원칙을 분명히 했다.
노 대통령 모두 발언=우리 모두가 긴 터널을 빠져 나왔으니 새 출발 했으면 좋겠다. 요즘 일반적으로 경제가 어렵다고 말한다. 경제를 이끄는 여러분께 직접 생생한 진단 들어보고 처방도 함께 마련하는 자리였으면 한다. 언론이나 경제 단체에서 제기하는 (경제적) 어려움을 분석해 보면 그 논의가 꼭 정확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상당히 많은 논의가 조금 본질을 벗어나는 것은 대체로 또 다른 목적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닌가.
김재철 무역협회 회장=이 자리에 불러줘 감사하다. 수출 증대를 위해 많은 관심을 갖고 지원해달라. 자유무역협정(FTA)을 적극 추진할 필요가 있다.
이용경 KT사장=휴대용 인터넷의 조기 상용화 기반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되면 32조원의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고용을 늘릴 수 있다.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지역균형발전법이 통과돼 지역 상공회의소들이 큰 기대를 갖고 있다 적극적으로 협조해서 법 취지에 따라 사업이 잘 되도록 노력하겠다. 의료·교육 등과 같은 서비스업 규제를 완화했으면 한다. 국공유지 활용 방안 있었으면 좋겠다. 각종 기금에서 사회간접자본 투자 활성화했으면 좋겠다.
구본무 LG 회장=수도권에 부지가 있다면 연구·개발(R&D) 센터 건립이 허용됐으면 좋겠다. 이공계 지원을 강화해달라.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세계적으로 자동차 공급 능력이 6,400만대인데 수요는 4,500만대 밖에 안돼 경쟁이 치열하다. 연구·개발 인력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이건희 삼성 회장=내수와 투자가 부진하지만 투자와 고용을 확대하면 선 순환 구조로 바뀔 것이다. 사회적 책임의 나눔 경영을 추진하겠다. 투자 인센티브가 보강되고 노사관계가 안정되면 외국인 투자 확대가 가능하리라고 본다. 소모적 다툼을 끝내고 화합, 상생하는 식으로 국가 운영이 됐으면 한다.
강신호 전경련 회장=여기에 참석한 15개 기업이 금년에는 작년의 34조원 보다 훨씬 늘어난 46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95년 이후 최고 증가율이다. 그리고 오늘 협의한 내용이 계속 이행될 수 있도록 후속 조치에 최선을 다해 줬으면 한다. 앞으로 기업별로 구체적 투자 논의를 하고 대국민 투자 보고대회를 할 예정인데 대통령이 참석해주면 고맙겠다.
노 대통령 마무리 발언=이윤의 논리에 따라 움직여도 여러분들이 애국심을 갖고 경영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고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정경유착은 반드시 근절하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하고 꼭 지켜나갔으면 한다. 규제에 관한한 구체적으로 제기하면 풀어야 할 것은 과감히 풀겠다. 출자 총액 제한 투명성 지배구조가 쟁점화 되고 있는데 이는 언젠가 해결해야 하는 과제이다. 대기업 노사가 높은 수준의 임금을 결정하면 바로 중소기업에 많은 부담이 된다. (경제) 위기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무리한 정책을 쓰게 되고 결과적으로 후유증이 남는 사례를 많이 봤다.
/김광덕기자 kdkim@hk.co.kr
■몸사린 재계/공정거래법·규제완화 등 민감사안 일절 언급안해
'입 닫은 재계?' 노 대통령과의 청와대 회동에서 재계 총수들은 말을 아꼈다.
최근 재계가 출자총액제한제와 금융기관 의결권 축소 등 정부 정책에 정면으로 공박했던 것과 비교하면, 이날 총수들은 극도로 몸을 사렸다.
청와대는 당초 회동의 성격에 대해 '무엇이 문제인지'를 실무적으로 토론하는 자리라고 규정했지만, 재계 총수들의 소극적 태도로 이날 회동은 결과적으로 대통령의 '재벌 군기잡기'와 '훈계'로 흘렀다는 평가다.
총수들은 수도권 규제 등 획기적인 규제 완화를 요구하기 보다는 투자확대를 위한 세제지원만을 요청했다. 세액공제 및 교육개방 확대나 교육개방 등 서비스 규제 완화 등의 건의사항도 이미 언급했던 것 일색이었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이나 사회공헌기금 조성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반면 노 대통령은 규제개혁 방침을 강조하면서도 시장개혁 의지를 분명히 했다. 노 대통령은 "정부정책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정부를 비판하다 보니 본질이 왜곡될 수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은 또 "지배구조 투명성은 세계적 추세이고 국민의 뜻이기도 하다"며 "이 문제를 놓고 계속 공방을 벌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강신호 전경련 회장은 회동이 끝난 뒤 "허심탄회하게 서로간의 얘기를 충분히 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재계 총수들은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민간연구기관 한 관계자는 "총수들이 각 그룹별 투자금액과 품목까지 적시해 대통령에게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며 "대통령과 재계 총수들이 만났다고 해서 갑작스레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라고 말했다.
/유병률기자
■"투자" 말보따리 푼 재계/실제 집행이 관건
재계는 노무현 대통령과의 청와대 회동에 대한 '화답'으로 조만간 세부 투자방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삼성 LG 현대차 SK 등 이날 회동에 참석한 15개 그룹이 밝힌 올해 투자규모는 46조원. 이는 지난해 투자실적(34조2,000억원)에 비해 34.2%, 연초 투자계획에 비해서는 16.8% 늘어난 것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회동 직후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등 핵심 경영진이 참석한 가운데, 구체적인 후속대책을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삼성은 27일 반도체와 액정표시장치(LCD), 플라즈마디스플레이패널(PDP), 휴대폰 등을 중심으로 총 16조5,000억원 규모로 잡았던 올해 투자를 20조원 가량으로 늘리고 협력업체에 대한 지원도 당초 1조원 규모에서 1조5,000억∼2조원으로 늘릴 방침을 밝힐 예정이다. 삼성은 또 매년 투자규모를 20% 이상씩 확대 2006년까지 3년간 총 70조원을 중장기적으로 투자하는 한편, 신규채용도 매년 1만5,000∼2만명 씩 늘린다는 계획이다.
올해 9조4,000억원을 투자할 계획인 LG는 2010년까지 연구개발(R& D)에 30조원을 투자, 세계 3대 전자·정보통신 회사로 도약하겠다는 계획이다. LG는 특히 현재 건설중인 LG필립스LCD공장에 향후 10년간 모두 25조원을 투자, 2만5,000여명의 고용창출 효과를 올릴 방침이다.
지난해 분식회계 사건으로 투자가 크게 줄었던 SK도 청와대 회동 후 계열사 사장단 회의를 열어 향후 투자계획과 실천방안을 논의했다. SK는 일자리 창출을 위해 2007년까지 추가로 8조∼9조원을 위성 DMB(디지털 다채널 이동방송) 등 신규 사업분야에 투자, 9만명 이상의 고용창출 효과를 낼 방침이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15개 그룹이 지난해보다 12조원의 투자를 늘린다면 고용창출이나 경기회복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올 1·4분기 15개 그룹의 투자집행률은 16.3%에 불과, 투자의 성장 견인 효과가 미미했다.
문제는 이들 그룹이 계획대로 투자를 할 것인지 여부. 계획만 발표해놓고 돌발적인 정치상황이나 대외여건의 변화가 발생할 경우 실제 집행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책 연구기관 관계자는 "폭발적인 수출 증가로 설비투자 압력이 높아졌기 때문에, 재계도 더 이상 투자를 미룰 수는 없을 것"이라며 "그러나 투자계획 전액이 집행될 지도 두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유병률기자 bry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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