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란 중이던 1952년 5월25일 이승만 정부는 임시 수도 부산과 그 주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비판적 국회의원 12명을 용공 혐의로 구속했다.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의 시작이었다. 제1공화국 시절의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이 흔히 그랬듯, 부산 정치파동도 이승만의 장기 집권 욕심에서 비롯되었다.대통령을 국회가 뽑도록 규정한 제헌헌법에 따라 네 해 전 무려 92%가 넘는 압도적 득표율로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에게 국회 상황은 점점 어려워져 갔다. 그의 독재적 스타일에 반감을 품은 국회의원들 다수가 등을 돌리자 이승만은 1952년 1월 정부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내놓았지만, 야당이 지배하는 국회는 당연히 이를 부결시켰다. 그러자 이승만은 이른바 땃벌떼, 백골단, 민중자결단 따위의 폭력배들을 동원해 국회의원들에게 공갈과 폭행을 가하는 한편, 관제 데모를 조직해 국회 해산을 요구하도록 했다. 계엄령 선포와 비판적 국회의원 구속은 이승만에게 실제로 국회를 해산할 뜻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제적 비난 여론이 들끓자 이승만은 국회 해산은 보류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국회가 가결한 구속의원 석방안과 계엄령 해제안은 거부했다. 또 전 부통령 김성수를 비롯한 정치 지도자 81명이 6월20일 부산의 국제구락부에 모여 '입법부 수호 및 반독재 호헌 구국 선언'을 하려 하자, 다시 폭력배들을 동원해 회장을 난장판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것이 이른바 국제구락부 사건이다. 장택상이 중심이 돼 정부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과 국회의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뒤섞어 마련한 이른바 발췌개헌안이 7월4일 국회를 통과하고 28일 비상계엄이 해제되면서 부산 정치파동은 마무리되었다. 제2대 대통령 선거는 비상계엄이 해제되고 겨우 일주일이 지난 8월5일 국민 직선으로 치러졌고, 이승만은 뜻대로 낙승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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