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움직이지 말고 더 높이 차!" 24일 태릉선수촌 체조장. 평소엔 차분하고 조용한 이주형(32) 코치의 날카로운 음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한번 더! 꽉 잡아!" 이를 악물고 평행봉에 매달린 조성민(28)의 몸놀림이 구령에 힘이 난 듯 날다람쥐 같다. "0.000, 소수점 이하 세 자리가 메달 색깔을 바꾸는 게 체조입니다." 콧등을 타고 떨어지는 땀을 닦을 새도 없이 숨을 가쁘게 몰아 쉬는 조성민이 안쓰러울 법도 한데 이 코치의 설명은 매정할 만큼 단호하다.
2000시드니올림픽에서 한 선수가 2개의 메달을 딴 것은 한국체조 사상 전무후무한 쾌거였지만 그놈의 메달 색깔 때문에 늘 2% 부족했던 이 코치였다.
"평행봉 은메달, 철봉 동메달도 대단한 거죠. 게다가 올림픽을 앞두고 이두박근이 끊어졌었거든요. 은하고 동 합하면 '금' 아닌가요? 하하. 저 자신에게 후회는 없습니다. 하지만…"
말을 잇지 못하는 데는 사연이 있다. 당시 이 코치는 평행봉 예선 1위로 결선에 올라 금메달은 떼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출전 순서가 문제였다.
4번째로 나선 그는 9.812점을 받아 세계최강 네모프를 0.012점차로 앞섰지만 7번째 주자인 리 샤오펑이 9.825점을 받는 바람에 0.013점차로 은메달에 그쳤다.
더 안타까운 일은 심판 6명의 총배점을 합치면 리샤오펑보다 0.05점 많았지만 최저, 최고점을 빼니 거꾸로 0.05점이 뒤졌다는 것. 철봉에선 착지 때 발을 삐끗하는 바람에 1위와 0.012점차로 동메달을 땄다.
"체조는 발가락 하나의 떨림 때문에 순위가 바뀝니다. 사람이 점수를 매기는 거라 변수도 많아요. 주위에선 마지막에 나섰다면 금메달이었다고 위로하지만 패자는 말이 없는 법이잖아요."
'0.000' 그 피 말리는 승부에서 고배를 마신 터라 이 코치의 훈련이 무딜 리 없다. 무작정 다그친다고 금메달이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 코치가 준비한 '비기(秘器)'는 두 팔로 지탱한 자세에서 뒤돌기하며 물구나무서고 360도 회전하기다. 이름하여 세계절정의 고수도 딱 2명(중국, 러시아)만 연기할 수 있다는 슈퍼E난도의 '포시타 1분의 1턴.' 성공만 하면 0.3점의 큰 가산점이 따라붙는다.
이 코치는 "세계 대회를 두루 다녀봤는데 그 기술을 한다는 선수조차도 완벽하게는 못 하더라구요. 근데 성민이는 완벽하게 마스터했습니다. 착지도 좋구요." 조성민이 쑥스러운 듯 한마디 걸쳤다. "코치님한테 처음 배운 기술인데 아직 멀었어요"
기술도 기술이지만 조성민에게 이 코치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정신적인 지주"다. 늘 올림픽 금메달 유망주로 꼽혔으면서도 잦은 부상 때문에 선수촌을 자주 떠나야 했고, 이번 최종선발전에서도 오른쪽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삐끗해 주눅이 들었다. 그런 조성민에게 부상을 딛고 올림픽 신화를 일군 이 코치의 재기담은 가슴 벅찰 수밖에 없다.
조성민은 "일단 기술이 몸에 붙으면 자세가 잘못 돼도 본인은 모르고 넘어가는데 그때마다 코치님이 그 기술을 다시 처음부터 가르쳐 주고 교정해주는 게 큰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약점이요? 성민이가 세계대회에 자주 못 나가 지명도가 낮은 게 걸려요. 하지만 세계 최고의 기술을 선보이는데 모른 척 하겠어요. 신기술보단 변종기술을 얼마나 소화하느냐, 10가지 기술을 어떻게 조화롭게 연결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실수만 없다면 성민이가 금메달입니다."
평행봉에 오르는 조성민을 돕던 이주형 코치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고찬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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