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초 서울 양재동 현대·기아자동차 본사 1층 품질회의실. 정몽구 회장이 회의실에 들어서자 중역 50여명이 일제히 일어났다. 그러나 정 회장은 곧바로 회의실 옆 '전시장'으로 향했다. 이 곳엔 출시를 앞둔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투싼이 놓여져 있었다. 정 회장은 손수 시동을 걸어보고 보닛을 열어본 뒤 "하체도 한 번 봅시다"라고 말했다. 리프트로 차가 올려 졌고 차축 등을 꼼꼼히 살펴본 정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변속기에서 나는 소리가 너무 큽니다. 완벽한 품질이 보장될 때까지 출시를 연기하십시오." 순간 품질본부 임원들과 엔지니어들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 때문에 투싼의 출시는 당초 계획보다 한달 가량 늦춰졌다. 그러나 이러한 품질경영 덕에 투싼은 현재 주문 후 2∼3달을 기다려야 차 키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매월 둘째주 월·화요일 정 회장이 주재하는 현대·기아차 품질회의는 이렇게 진행된다.
지난해엔 EF쏘나타와 경쟁 차종인 도요타 캠리를 함께 갖다 놓고 비교하며 품질회의를 열기도 했다. 필요한 경우 협력업체들까지 참석, 개선방안 등을 논의하고 미국이나 유럽 현지에서 '비교 품질회의'를 열기도 한다. 현대차 관계자는 "1990년대 후반 미국시장에서 퇴출 1순위로 지목받던 현대차가 올해 J.D.파워의 신차품질 평가에서 도요타에 이어 혼다와 함께 2위(회사부문)를 차지한 것은 이러한 품질경영의 결과"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유수한 외국 자동차 메이커가 품질경영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문의해올 정도이다.
현대차가 품질과 기술로 이룬 장족의 발전은 긍정적인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아직 샴페인을 터트릴 때는 아니라고 강조한다. 원천기술, 주요부품, 디자인, 도장 등 전반적인 분야에서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은 여전히 선진국 업체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특히 미래 자동차 시장의 핵심이 될 연료전지, 친환경 분야의 기술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고 있다.
최근 산업은행이 펴낸 '국내 자동차 부품산업의 세계화 대응전략 보고서'에 따르면 선진국 기술을 100으로 볼 때 국내 주요 자동차 부품의 기술경쟁력은 연료전지와 전자식 주행시스템(Steer By Wire) 부문이 각각 36, 하이브리드 자동차(기존 내연기관에 구동모터와 축전지를 장착한 자동차) 부문이 38에 그치고 있는 등 선진국 업체에 비해 크게 뒤떨어져 있다. 지능형 전장도 66에 불과하고 저공해 엔진도 87에 머물렀다.
기술 경쟁력 확보와 함께 한국자동차 산업이 풀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는 진정한 세계화의 실현이다. 한국자동차산업은 이미 생산과 판매에선 세계화를 달성하고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는 자동차 생산(318만대)과 수출(182만대)에서 세계 6위를 기록했다. 중국, 인도, 베트남, 터키에서 우리 자동차가 생산되고 있고 미국과 슬로바키아에도 공장이 건설되고 있다.
문제는 경영의 글로벌라이제이션이다. 현대차의 올해 미국 판매실적이 기아차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부진한 것과 관련, 일각에선 지난해 현대차 미 법인의 미국인 수뇌부가 대거 이탈한 사실에 주목한다. 진정한 의미의 현지화가 아쉬운 대목이다.
그러나 한국 자동차 산업이 세계 4강에 진입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가장 큰 과제는 무엇보다 대립적인 노사관계의 극복이다. 우리 자동차 산업의 고질병으로 지적되는 노사 분규는 생산, 수출, 투자 차질 등을 초리하며, 한국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을 위협하고 있다.
저임금과 높은 생산성으로 단기간에 성장한 자동차 산업이 90년대 이후 임금 인상을 따라가지 못하는 생산성 둔화로 경쟁력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공업협회 관계자는 "미국 자동차 업체들은 연금 및 의료보험비 등으로 인한 노동비용 상승과 생산성 저하로, 독일과 프랑스는 높은 임금과 근로시간 단축으로 인한 경쟁력 상실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반면 완성차 업체와 부품업체간의 긴밀한 협조 및 노사협력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원가를 절감한 일본 업체들이 세계 자동차 시장의 강자로 다시 부상하고 있는 점을 곰곰이 되새겨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일근기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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