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북구 '슈퍼세녹스 종합페인트'라는 간판이 붙은 한 페인트 상점. "유사 휘발유를 살 수 있느냐"고 묻자 종업원이 상점 한켠에 쌓아놓았던 페인트통 2개를 내어주며 "차례로 차량 연료 주입구에 부으면 된다"고 말했다. 페인트통에는 시너라고 적혀있다.종업원은 "2개를 혼합하면 시중에서 유행했던 '세녹스'와 똑같은데, 톨루엔을 좀 더 많게 혼합하는게 좋다"며 적정 혼합배율까지 안내해줬다.
유가가 고공행진을 이어가자 가짜 휘발유가 법망을 교묘히 피해가며 활개를 치고 있다. 대도시 주변 으슥한 국도변이 아닌 시내 페인트 상점에서 버젓이 시너의 일종인 솔벤트와 톨루엔을 혼합한 가짜 휘발유가 ℓ당 800원대의 가격에 팔리고 있다. 가짜 휘발유를 완제품 형태로 주유해 주지만 않으면 법에 걸리지 않는다는 점을 악용, 솔벤트와 톨루엔 등을 따로 판매한 뒤 구입자가 직접 혼합·주유토록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5일 경기 의정부경찰서는 K화학 대표 이모(35)씨를 석유사업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이씨는 페인트 상점을 차린 뒤 한달 동안 20ℓ짜리 가짜 휘발유 800여통을 만들 수 있는 솔벤트와 톨루엔을 판매해 1,000여만원을 챙긴 혐의다. 수사 관계자는 "이씨가 '가짜 휘발유를 만들기 위해 팔았다'고 자백하지 않았으면 구속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씨로부터 솔벤트와 톨루엔을 받아 팔아온 판매업자 배모(42)씨는 "시너를 팔았을 뿐 결코 자동차 연료가 아니다"라고 혐의를 극구 부인, 불구속 입건됐다.
현행 석유사업법은 자동차 연료로 사용할 목적으로 가짜 휘발유를 제조·판매·사용할 경우에만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때문에 이들처럼 가짜 휘발유의 재료로 쓰일 수 있는 솔벤트 등을 따로따로 판매했을 경우 처벌이 어렵다.
가짜 휘발유 판매업자들은 이를 악용, 생활정보지 등에 광고까지 내며 전국적인 판매에 나서고 있다. 경찰은 서울에만 10여개의 가짜 휘발유 조직이 일선 판매책을 모으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강원지역에서 가짜휘발유를 팔고 있는 A씨는 "차량에 혼합 주유하기 쉽게 아예 솔벤트와 메틸렌 용기를 따로 만들어 파는 '쪼개기' 수법이 성행하고 있다"며 "1주일에 1,800여통을 팔았을 정도로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안형영기자 ahn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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