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명 대기업의 부장으로 재직 중인 김진수(45·가명)씨는 지난달 초 서울 구로동 32평 아파트를 처분하고 남몰래 경기 성남시의 20평짜리 전세 다가구주택으로 이사했다. 김씨의 현재 월 수입은 약 400만원. 부인과 두 아들을 부양하고 있는 어엿한 중산층 가장이다. 남 부러울 것 없던 그의 가정에 어두운 그림자가 덮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말. 김씨는 작년 9월 직장동료들과 의기투합해 최첨단 기술을 개발 중인 정보통신 관련 업체에 빚을 얻어 1억원을 직접 투자했으나 극도의 경기침체에 따른 업체 부도로 원금도 회수하지 못했다. 카드 대출금 돌려 막기에 허둥대다 사채시장의 단기자금에 손을 댔고 빚은 눈깜짝할 사이 4억원으로 불어났다. 3,000만원대 고급승용차를 팔았고 중학생인 두 아들은 다니던 학원을 모두 그만둬야 했다.
"단지 아이들과 노후를 위한 투자였을 뿐인데… 가족들을 볼 낯이 없습니다." 결혼생활 10년만에 마련한 아파트를 처분하던 날 펑펑 울던 아내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는 김씨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려 술에 취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아직 직장에 붙어있는 난 실직 뒤 소식이 끊긴 고교 동창들보단 나은 편"이라며 "거액의 채무사실이 알려져 퇴사라도 당하게 되는 날이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두려워 했다.
월급의 절반 이상이 부채상환에 쓰여 살림이 궁해지자 김씨의 부인도 최근 가내부업을 시작했지만 좀처럼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지금 사는 전셋집도 조만간 사글세로 옮겨야 할 판"이라는 김씨는 "생활고 때문에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 것 같다"며 고개를 떨궜다.
끝을 알 수 없는 경제 불황으로 생활고에 허덕이는 서민들이 집 밖으로 내몰리고 있다. 혹독한 IMF도 견뎌냈던 중산층 가정들은 서민층으로, 다시 서민층들은 수도권 빈민촌과 지방을 전전하는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2002년말 264만명이던 신용불량자의 수는 올 3월 392만명으로 급증, 전체 경제활동 인구의 17%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신용불량자로 대표되는 신빈곤층은 기존의 일반빈곤층과 달리 젊고 근로능력이 있지만 빈곤에 대한 대처능력이 부족해 경제 침체와 사회 불안에 더 큰 변수로 자리잡고 있다.
전직 은행원이었던 최명기(43·가명)씨. 강남 개포동의 한 소형 아파트에 거주하며 재개발 이익을 기대하던 그의 꿈은 갑작스런 실직과 함께 산산히 깨졌다. 지난해 말 은행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은 그는 월 수입이 끊기자 17평짜리 아파트를 전세로 돌린 뒤 얻은 돈으로 4식구의 생계를 간신히 이어왔다. "여러 차례 재취업에 도전했으나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는 최씨는 "아파트에서 나오는 돈이 끊기면 그야말로 거리로 내몰릴 신세"라고 한탄했다. 보험회사에 취직한 부인의 월 성과급은 불과 20만원. 1억여원이 넘던 전세금도 모두 바닥나 현재 매달 50만원의 월세를 물며 살고 있다. 급기야 월 공과금도 납부하지 못해 지난달엔 전기와 수도가 끊겼다. 가스비도 4개월째 체납 중인 최씨는 "이제 겨우 초등학생인 두 아이를 앞으로 어떻게 가르쳐야 할 지 눈 앞이 캄캄하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장기 경기침체의 영향으로 서민들 중 상당수는 서울 외곽의 빈민지역과 지방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탈(脫) 서울 러시'를 이루고 있다. A감정평가법인의 한 관계자는 "최근 서울에서 수도권 인근 저소득층 밀집 지역으로 이주하는 서민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며 "인천과 경기 성남·시흥시가 대표적인 이주지역"이라고 말했다.
'부의 상징'인 타워팰리스가 한눈에 들어오는 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빈민촌 구룡마을에도 최근 외지인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비닐하우스 보온재로 외벽을 친 가건물에서 15년째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최모(58·여)씨는 "사업이 망했다며 월 5만원짜리 방을 물어보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고 귀띔했다. "2,300여 세대가 넘는 이 마을에도 투기꾼들이 사놓은 빈방들이 수두룩해. 요즘은 생면부지의 외부인들이 이 빈방들을 무단 점유하다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지." 21일 오후 마을회관에서 점심을 먹던 통장 장모(48)씨는 "마을차원에서 대책도 필요하지만 생활이 어려워 이곳으로 오는 사람들을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혀를 찼다.
치솟는 물가와 만성 취업난은 신빈곤층의 재기 가능성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지난해 대학을 졸업한 장모(28)씨는 2년전 부친(51)이 사업장 안전사고로 1급장애 판정을 받은 뒤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지만 취업이 여의치 않아 술집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마련하고 있다. 부친의 사고 이후 치료비 등으로 발생한 2,000만원 가량의 가계부채가 1년만에 8,000만원으로 불어나자 장씨 가족은 지난해 의정부 인근 25만원짜리 월셋방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장씨는 "안정적인 직장만 있더라도 그럭저럭 집안사정이 나아질 텐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한국빈곤문제연구소의 류미경 실장은 "기초생활보장 수급대상자 선정에 개인부채비율이 참작돼야 하고 서민들이 건전한 경제생활을 할 수 있는 제도적 방안을 국가가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준택기자 nagne@hk.co.kr
■서민 다세대주택 경매시장에 봇물
매주 화요일마다 압류된 부동산의 경매가 실시되는 서울서부지법. 지난 18일의 경매매물은 총 72건. 그 중 3분의 2 이상이 다세대 주택 등 서민주택이다. 경기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가계부채를 감당하지 못한 서민들의 다세대 주택이 압류돼 경매시장에 마구 쏟아지고 있다. 실제로 경매전문업체인 디지털태인에 따르면 서울지역 다세대·연립주택의 경매 물건수는 지난해 4월 588건에 불과했으나 9월 634건, 12월 887건, 올해 3월 1,212건, 4월 1,045건 등으로 급증하고 있다. 하지만 요즘 나오는 매물은 대부분 이미 지난해 물건들이다. 불황의 장기화에 따라 올해 쏟아질 매물 건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란 견해가 많다.
서울서부지법 관계자는 "지난해 말부터 압류된 다세대 주택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 올해 쌓여있는 매물 건은 아직 손도 대지 못했다"고 귀띔했다. 다른 곳도 상황은 마찬가지. 서울중앙지법과 서울의 각 지법, 그리고 지방의 작은 법원까지 서민주택 매물 러시가 이어지고 있다.
M부동산의 최모(43) 사장은 "매물로 나온 다세대주택은 서민들이 융자를 끼고 매입했다가 소득이 줄어 융자금을 갚지 못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되팔거나 채권자에게 빌린 돈을 갚을 길이 없어 마지막 선택으로 내놓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2∼3년 전부터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불기 시작한 부동산 가격 폭등에 따라 서민들도 무리하게 차입을 통해 내집 마련에 나서다 결국 이자를 감당 못해 주저앉은 경우가 많으며 심지어는 주인이 전세금을 빼주지 못해 세입자가 압류신청을 한 경우도 있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또 있다. 전반적인 부동산 시세가 작년 동기에 비해 10% 이상 떨어진 상태라 매물로 나오더라도 입찰되지 않고 계속 가격만 인하되는 상태가 반복되고 있다.
서울서부지법에 매물로 나왔던 서울 갈현동의 한 다세대 주택은 1억3,000만원인 감정가의 절반도 안 되는 5,640만원에 낙찰됐다.
법원 관계자는 "싼 값으로 경매에 부쳐진다 해도 어차피 서민들이 다시 사야 하는데 워낙 불경기다 보니 대부분 내집마련의 기회를 점점 뒤로 미루고 있어 매물로서의 서민주택 인기는 바닥권"이라고 말했다. 여기에다 서민주택 일수록 작은 단위의 채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어 낙찰을 받는다 해도 뒤처리가 쉽지 않은 문제도 있다.
/홍석우기자 museho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