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에 와서 우연히 '피아니스트'의 로만 폴란스키 감독을 만났다. 그와 함께 사진을 찍은 것만 해도 영광인데, 이렇게 큰 상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폴란스키 감독이 내게 '행운을 빈다(Good luck)'고 말해준 것이 진짜 '행운'이 된 것 같다."'올드보이'로 제57회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박찬욱(41) 감독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23일 새벽(한국시간) 영화제 메인 행사장인 팔레 드 페스티발 3층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그는 "나는 여기에 처음 온 감독이고, 워낙 위대한 감독들이 경쟁부문에 많이 있어서 상을 받을 줄은 몰랐다"며 "모든 공을 배우와 스태프에게 돌린다"고 말했다.
박 감독은 심사위원장인 쿠엔틴 타란티노가 "이 영화에 심사위원대상을 주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올드보이'를 호명하자, 상기된 표정으로 최민식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참석자들이 기립박수를 보내는 가운데 "고맙습니다"라고 말문을 연 박 감독은 "한국의 위대한 배우 최민식 유지태 강혜정에게 영광을 바친다"고 말했다.
이어 마이크를 잡은 최민식은 "'올드보이'가 그랑프리를 타게 도와준 죽은 네 마리의 낙지에 감사의 말과 함께 명복을 빈다"고 말해 16일 기자회견에 이어 또 한번 폭소와 박수를 받았다. 박 감독은 시상식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배우 최민식에 대해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시나리오의 지문을 표현하는 것은 배우의 몫"이라며 "최민식의 표현능력은 상상 이상"이라고 추켜세웠다.
심사위원대상 수상작 '올드보이'는 지난해 '살인의 추억'에서 시작된 '웰 메이드(Well―Made)' 상업영화의 계보를 이은 작품. 이유도 모른 채 15년 동안 사설 감옥에 갇혀 지낸 샐러리맨 오대수(최민식)와 그를 가둔 이우진(유지태)이 주인공이다. 가둔 자와 갇힌 자를 소재로 한 일본 동명만화 원작의 기본 틀에 근친상간이라는 반전과 한층 더 독한 복수의 과정을 덧붙였다.
이 작품은 영화제 초청 전 미국 인터넷 사이트 '에인트잇쿨닷컴' 선정 '2003년 세계 10대 영화'에 뽑혔으며, 일본에 220만 달러에 수출됐다. 또한 미국 메이저영화사인 유니버셜 픽쳐스가 50만달러에 리메이크 판권을 사들였고, 브래드 피트나 조니 뎁을 주연배우로 기용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현재 제작을 준비 중이다.
1992년 '달은 해가 꾸는 꿈'으로 데뷔한 박 감독으로서는 자신의 다섯번째 장편으로, 그것도 처음 참가한 칸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됐다. 특히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의 흥행성공(583만명)에 이어 칸영화제 수상으로 그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세계적으로 흔치 않은 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박찬욱 감독은 "서양에서 잘 다뤄온 장르를 갖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뜻에서 상을 준 것 같다"고 말했다.
폐막식을 하루 앞두고 열린 심사위원대상 시상식에는 샤를리즈 테론, 닉 놀테와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장만위 등 세계적 스타들이 참석했으며, 시상은 폐막작 '디 러블리'의 주연배우 애슐리 주드와 케빈 클라인이 맡았다.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 박찬욱 감독은
1963년 8월23일 서울 출생, 서강대 철학과 92년 '달은 해가 꾸는 꿈'으로 감독 데뷔 97년 '삼인조' 감독·각본, 2000년 '아나키스트' '휴머니스트' 각본, '공동경비구역 JSA' 감독·각본 2001년 '복수는 나의 것' 감독·각본(도빌영화제 작품상, 시애틀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2003년 '올드보이' 감독·각본
■치열한 작가정신, 세계가 인정
'올드보이'의 심사위원대상 수상은 한국영화 50년 숙원을 풀어준 2002년 '취화선'의 감독상(임권택) 수상 못지않은 쾌거.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이 다큐멘터리인 점을 감안하면, 극영화로서는 심사위원단으로부터 최고의 평가를 받은 셈이다.
한국영화가 세계 3대 메이저 영화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것도 처음이지만, 그 의미도 역대 수상작과는 다르다. 87년 '씨받이'(감독 임권택)의 강수연이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을 때만 해도 한국의 토속정서를 담은 영화에 대한 서양인들의 호기심으로 평가됐다. 이는 '취화선'의 수상 때에도 여전히 작용했다.
이에 비해 2002년 '오아시스'(감독 이창동·베니스영화제)와 올해 2월 '사마리아'(감독 김기덕·베를린영화제)의 감독상 수상은 처음으로 심사위원들이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 한국영화를 대했고, 그런 영화를 만든 감독을 높게 평가했다는데 의미가 있었다. '올드보이'는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심사위원대상을 받음으로써 명실공히 한국영화가 이제는 작품의 소재와 주제, 그리고 치열한 작가정신에서도 빼어나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예술영화 취향의 유럽영화제에서 상업영화가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것도 이례적. '올드보이'에 프랑스 필름 누아르 전통과 B급 영화의 색채가 많이 묻어 있음을 감안하면, 칸영화제로서도 과감한 노선변화를 시도한 셈이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박찬욱 감독은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부터 주류 영화담론에 저항해왔다"며 "지난해 전반적으로 '실패했다'는 평을 받은 칸영화제가 스스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한국영화와 감독의 에너지를 높이 평가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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