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서술어 중심으로 읽으면 전체의 성격과 갈래, 주제를 한결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는 서술어들이 모여 일정한 특성을 글 전반에 드러내고,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글 전체의 내용과 구성을 이루어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근거와 주장이 합리적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사설이라는 갈래의 글은 대개 두 개의 중심 서술어 군으로 최종 요약된다. '…가 문제다'와 '…해야 한다' 같은 서술어 군이 각각 근거와 주장으로 글 전체를 이루는 것이다.문학 작품을 읽을 때도 서술어를 중시하면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성장소설의 경우는 '새로 마주치는 동사', 즉 (새로운 감정이나 사건을) 경험하다/ (보편적인 갈등이나 고민과 같은 어려움을) 겪다 등의 동사군과 무사히 해결하여 성장하는 동사, 즉 (새로운 감정이나 사건을) 소화하다/ (보편적인 갈등이나 고민과 같은 어려움을) 극복하다 등의 동사군이 두 개의 큰 축을 이룬다.
이상의 작품 '날개'만 해도 '눕다' '걷다' '날다'라는 세 가지 동사군의 서술어가 작품 이해의 핵심임은 기본상식. 각각 유곽과 거리, 백화점 옥상이라는 공간과 연관되면서 무위도식하며 기생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시도하며 방황하다가/ 급기야 모든 힘을 다해 탈출과 극복을 시도하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할 뿐이라는 식민지 현실의 비극적 삶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이렇게 서술어를 중시하면 글의 성격까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모든 문학작품은 결국 세 개의 동사로 압축된다고 하지 않는가. '태어나서-살다가-죽었다!' 최근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미쳐야 미친다'(정민 지음, 푸른역사)는 두 개의 서술어인 미치다(狂)와 미치다(及)를 연결하여 책의 내용을 압축, 산뜻한 제목으로 바꾼 경우. 세상에 미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큰 일이란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허균 권필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정약용 등 무수한 우리 옛 인물들의 생생한 사례로 '서술한다!'.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이오덕, 길) 역시 이오덕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말씀이라는 버금 제목이 암시하듯, 기성 세대의 문제점을 질타하면서 아이들과 같이 순수하고 진지하게 살아갈 것을 강조한 책. 선생님 특유의 강단 있는 '서술어'들로 꽉 차 있다.
'정보의 달인'(임현민 등 7인, 넥서스북스)과 같은 실용서에서는 각종 비결들이 서술되고, '나는 달린다'(요슈카 피셔, 선주성 옮김, 궁리)와 같은 자서전에서는 독일 외상인 저자가 '달리다'라는 서술어가 결국 '사람답게 살게 되다'는 뜻으로 바뀐 자기 사례를 알려 준다. '나의 피는 나의 꿈 속을 가로지는 강물과 같다'(나스디지, 조병준 옮김, 푸른숲)는 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아들과 떠난 마지막 낚시여행. 본질적 삶으로 돌아가자는 서술어들로 가득하다.
글이 길고 복잡하다면, 그래서 글의 성격과 갈래, 주제와 구조에 대해 쉽게 꿰뚫고 싶다면, 서술어를 중시하여 읽자. 반복되고 변형되는 서술어들이 뜻밖에도 밤하늘의 별자리, 독해의 위치추적시스템(GPS)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허병두·책따세 대표·숭문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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