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주화운동이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24일 10·26사건의 주모자 김재규가 서울구치소에서 교수됐다. 54세였다. 김재규는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하던 그 전해 10월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의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열린 만찬회에서 대통령 박정희와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을 사살한 뒤 체포돼, 1980년 1월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박정희와 동향이었던 김재규는 1961년 5·16 군사반란 이후 호남비료 사장, 방첩부대장, 보안사령관, 군단장, 유정회 소속 국회의원, 건설부장관을 거친 뒤 1976년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다. 말하자면 그는 박정희 덕분에 화려한 공직들을 거쳤고, 마침내 박정희의 오른팔이 되었다. 그런 그가 왜 후원자 박정희를 살해함으로써 제 삶마저 수렁으로 밀쳐버렸는지 정확히 그 속내를 알 수는 없다. 대야(對野) 온건파로서 강경파 차지철과 쌓아온 불화 때문에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라는 주장에서부터 미국측의 암시를 받고 심사숙고 끝에 실천한 거사라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설들이 제출되었다.
구속 중에 쓴 '수양록'이나 법정 진술을 보면, 김재규는 자신의 행위를 '민주화 혁명'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듯하다. 특히 그 해 10월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의 의원직 박탈로 촉발돼 10월16일부터 너더댓새 동안 부산과 마산 일원을 휩쓴 대규모 반정부 시위와 이 사태에 대한 박정희-차지철 라인의 강경 대응이 그의 결심을 굳히게 한 계기가 된 듯하다. 가혹한 인권 탄압으로 지탱해온 유신체제는 경제 상황의 악화와 미국 카터 행정부와의 불화로 그렇지 않아도 기우뚱거리고 있었다. 본뜻이 무엇이었든, 김재규의 이 모험적인 궁정혁명 기도는 시민의 힘으로 독재자를 처단할 기회를 봉쇄하고 결과적으로 또 다른 군사정권이 부화할 환경을 마련해놓았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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