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판례를 깨고 양심적 병역거부에 첫 무죄를 선고한 서울남부지법 형사6단독 이정렬(사진) 판사의 잇따른 진보적 판결이 보수적 경향의 사법부내에서 상당한 파장을 낳고 있다. 이 판사의 판결 이후 사법부에서는 "다양한 가치관과 철학을 가진 젊은 판사들이 배출되면서 유사한 판결이 더 나올 것"이라는 예상 속에 "사법부가 너무 시대적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와 "사회변화에 부응한 것"이라는 긍정적 평가가 교차하고 있다."공무원 노동3권 5·16이 막아"
23일 서울남부지법에 따르면 이 판사는 공무원의 노동3권을 요구하는 집회를 연 혐의(지방공무원법 위반)로 불구속기소된 전공노 조합원 23명 전원에게 벌금 10만∼30만원의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선고유예는 선고 후 2년 내에 자격정지 이상의 형을 추가로 받지 않는 한 형의 선고를 면하게 돼 무죄와 같은 효력을 갖는다.
그동안 실정법을 위반한 전공노 조합원들에게 두차례 선고유예가 내려진 적이 있지만 당시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재판과정에서의 성실성' '초범인 점' 등을 주로 고려했다.
그러나 이 판사는 전공노 문제에 대한 자신의 판단과 의견을 적극 개진했다. 이 판사는 "피고인들은 1948년 제헌의회 이후 61년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부정될 때까지 인정됐던 공무원의 노동기본권을 되찾기 위해 불법행동을 한 점, 전교조와 달리 일반 공무원의 경우 입법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점, 허울 뿐인 내용의 공무원노조 특별법 입법 추진에 항의하기 위한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형의 선고를 유예한다"고 설명했다.
평가 엇갈리는 사법부
이 판사의 이 같은 판결 경향에 대해 사법부와 법조계의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입법으로 해결할 사안에 대해 사법부가 나서는 것은 3권 분립 취지에 반한다"고 지적했다. 다른 중견 판사도 "소수의 양심을 인정하면 다수에 대한 불균형이 발생할 수 있다"며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의 충돌 속에서 사법부는 소수보다 다수를 위한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일부 소장 판사들 가운데서는 "시대 변화에 부응하는 것"이라는 긍정적 평가도 나오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소장 판사는 "앞으로 다양한 가치관과 철학을 가진 젊은 판사들이 배출되면서 유사한 판결들이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진보적 판사들도 반대
이 판사는 강금실 법무부장관 등 진보적 전·현직 판사들로 구성된 연구모임인 '우리법 연구회' 멤버로, 지난 1일 열린 이 모임 월례세미나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발제를 했다. 이 판사는 당시 "양심적 병역거부권이 인정돼 획기적인 인권신장의 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고 한 참석자는 전했다. 그러나 모임 후 식사 자리에서 8, 9명의 판사들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놓고 표결을 한 결과 무죄 판결에 찬성한 회원은 1∼2명에 그치고, 반대는 6∼7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한 판사는 "이 판사 의견에 공감하지만 현행 법률상 무죄 선고는 어렵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전했다.
/김지성기자 jskim@hk.co.kr
■ "양심적 병역거부" 保·革갈등 조짐
법원이 처음으로 무죄를 선고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진보 단체들은 이번 판결을 적극 환영하는 반면, 보수 진영은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어 이라크 추가파병 문제에 이어 또 한번 보·혁 갈등 조짐마저 나타나고 있다.
23일 각종 인터넷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이 우세한 편이다. 그러나 대체복무제 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과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처벌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견해도 조금씩 부각되고 있다.
참여연대 이태호 정책실장은 "학력과 특수기능의 차이에 따른 대체복무제가 사실상 시행되는 와중에서 유독 종교적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자들만 처벌돼 왔다"며 "이번 기회에 대체복무제 기회가 보장돼야 한다"고 말했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도 "병역 거부권의 부정적 인식에는 '나도 고생했으니 너도 고생해야 한다'는 식의 보복심리가 숨어있다"며 병역문제에 대한 재논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반대론자들은 양심적 병역거부나 대체복무제 등에 대한 논의 자체가 시기 상조라는 입장이다. 헌법학자인 명지대 허 영 교수는 "헌법은 양심의 자유와 함께 국민의 국토방위 의무도 규정하고 있다"며 "이번 판결은 헌법을 통일적으로 해석하지 않은 잘못된 판결"이라고 말했다. 재향군인회는 "병역거부는 국민적 도리와 의무를 저버린 반사회, 반국가적 행위"라고 규정했다.
정치권과 종교계도 진보·보수 성향에 따라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열린우리당 임종인 당선자는 "대체복무제 관련 법안을 제출하겠다"고 밝힌 반면, 한나라당 송영선 당선자는 "안보의 해이감이 우려된다"고 반대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는 대체복무제 도입 쪽에 무게를 실었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반대입장을 밝혔다.
/홍석우기자 musehong@hk.co.kr 신재연기자 poet33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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