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5월22일 샹송 가수 샤를 아즈나부르가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르메니아인이었던 그의 부모에게 당초 파리는 미국으로 이민하기 위한 경유지였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인 이민 쿼터가 차는 바람에 그들은 미국 비자를 받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미국인이 될 뻔했던 그들의 둘째아들은 프랑스인이 되었다. 이 우연은 프랑스에 큰 축복이었다는 것이 뒷날 밝혀졌다.샤를 아즈나부르의 본명은 샤흐누르 바레나그 아즈나부리안이다. 병원에서 이 아이를 받아낸 간호사는 '괴상한' 아르메니아어 이름 샤흐누르가 발음하기 힘들어서 '쉬운' 프랑스어 이름 샤를로 불렀는데, 아이의 부모도 이내 간호사의 '작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샤를 아즈나부르는 아홉 살 때 모리스 슈발리에에게 반해 샹송 가수가 되기로 결심했고, 이내 학교를 때려치운 뒤 10대 때부터 무대에 섰다.
아즈나부르가 처음 이름을 얻은 것은 작곡가로서였다. 그가 쥘리에트 그레코에게 준 '나는 일요일이 싫어요'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전통적 샹송 가수들의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아즈나부르의 구슬프고 모난 듯한 '동양적' 목소리가 샹송에 부적합한 듯도 보였다. 그러나 아즈나부르는 이 '비정통적' 목소리로 프랑스만이 아니라 전세계를 휘어잡았다. 그는 샹송의 마르틴 루터였다. 다소 맥없는 서정시 같았던 전통적 샹송은 아즈나부르라는 '이단자'를 거치며 일종의 도시 집시음악으로 탈바꿈했다. 아즈나부르는 가사에 속어나 비어를 과감히 사용하며 이 '문학적인 체하는 대중음악'을 살롱에서 거리로 끄집어냈다. 그리고 그것이 아즈나부르 음악을 프랑스어권 바깥으로 퍼져나가게 한 원동력이었다. '라마마' '라보엠'을 비롯한 그의 앨범들은 전세계에 1억장도 훨씬 넘게 팔려나갔다. 미국의 재즈 뮤지션들이 아즈나부르의 고전들을 취입한 '재즈나부르'라는 앨범도 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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