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는 숱한 화제와 뒷이야기를 남겼다.검찰은 수사초기 국민적 공분을 야기한 '해외에 빌딩 산 축재(蓄財) 정치인'에 대해 실명을 밝히진 않았지만 일단 한나라당 A의원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선 당시 주요 역할을 했던A의원은 대선잔금도 유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 같은 점을 십분 활용, A의원의 입을 통해 한나라당의 각종 비리를 끄집어내는 개가를 올렸다.
사실 검찰은 지난해 10월 SK 이외의 5대 기업으로 수사를 확대할 때만 해도 '빈손'이었다. 수사단서 조차 없이 심증만으로 수사에 착수한 뒤 안대희 중수부장은 5대 그룹 부회장급 인사들을 대검 청사 밖에서 만나 '수사협조'를 당부했다. 그러나 반응이 없자 안 부장은 압박용 압수수색과 총수 비리 내사를 공개하며 압력수위를 높였다. 수사팀은 LG가 먼저 '한나라당에 차떼기로 150억원 제공' 사실을 털어놓자 쾌재를 불렀다. 안 부장은 "대통령이 불법자금 수수와 무관치 않은 정황이 나왔을 때와 LG의 자백이 있기 이전까지 기업들과 줄다리기를 했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술회했다.
기업수사팀을 이끈 이인규 원주지청장은 기업들의 기피대상 1호였다. 지난해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사부장 당시 SK 등 대기업 비리를 꿰찼던 그가 언제 원주로 복귀할지가 대기업들의 주요 관심사였을 정도다. 대통령 측근비리 수사를 맡은 남기춘 중수1과장은 강력부 검사 경력 때문에 여권에서 '측근들을 깡패 다루듯 한다'는 말까지 들으며 '손볼 사람'으로 꼽히기도 했다. 유재만 중수2과장은 '차떼기' 등 굵직한 성과물을 찾아내 한나라당의 원성을 샀다. 유 과장이 지휘한 사채시장 수사로 검찰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추가 비자금 373억원을 찾아내는 예상 밖의 소득을 올리기도 했다.
수사를 받는 기업들의 대응도 천차만별이었다. SK의 한 인사는 조사 도중 "죽어버리겠다"며 검찰을 협박하기도 했고, 삼성의 인사는 조사후 심한 구토를 했다. 현대차는 책임자에 대한 내부정리가 안돼 끝까지 시소게임을 벌여야 했다.
롯데의 경우, 소환에 불응한 신동빈 부회장이 일본 야구장에서 팔짱을 낀 채 웃는 모습으로 이승엽 선수의 배팅 연습을 지켜보는 장면이 TV 스포츠뉴스에 보도되는 바람에 이를 본 수사팀이 공분, 수사 강도를 높였다는 후문이다. 재벌 회장으론 유일하게 구속된 손길승 SK 회장은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다른 회장들이 여기 오지 않는 것"이라며 심경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태규기자 tglee@hk.co.kr
■ 안대희 중수부장 일문일답 "국민 성원에 감사" 눈물
10개월간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진두지휘해 온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은 21일 "비판은 달게 받겠지만 부끄러운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안 부장은 방송사와의 인터뷰 도중에는 "국민들의 성원에 감사한다"고 말하다 눈물을 보이기도 해, 그간 겪은 심적 부담과 괴로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 불입건 조치는 형사소추 대상이 안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혐의가 인정되지 않기 때문인가.
"불법 대선자금 모금에 관해서는 혐의가 없다. 장수천 빚 변제 등 측근비리와 관련된 부분은 지난해 12월 수사결과 발표 때 '나름대로 판단을 가지고 있다'는 입장 그대로이다. 그 이상을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장수천 문제 등에 대해, 노 대통령이 퇴임한 후 다시 수사를 할 수도 있나.
"나는 그때 검사를 안할 것 같다."(웃음)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잔금 보관 혐의는 충분히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볼 수 있지 않나.
"가벌성이 높지 않다. 자금 모금에 참여한 것으로 판단되지만 돈을 돌려줬고, 사적 이득을 취하지 않았다. 채권을 수수한 서정우 변호사 등이 처벌 받은 점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을 불입건한 이유는.
"불법자금 전달에 개입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당시 이 회장은 외국에 있어서 내용을 잘 몰랐고, 이학수 부회장이 재산관리에 대해 일일이 보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소감은.
"정치적 논란에서 벗어나게 돼 홀가분하다. 비판은 달게 받겠지만, 부끄러울 것은 하나도 없다. 후배 검사들이 잘해서 이런 비리가 다시는 없었으면 한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청와대·與 "부패근절 앞장"
청와대는 21일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 결과 발표에 대해 "깨끗한 정치, 투명한 경영을 바라는 국민과 시대의 요구를 수용한 공정한 수사였다"고 평가했다. 윤태영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이번 수사를 통해 검찰 수사 독립의 새 전기가 마련됐다"며 이같이 밝혔다.
윤 대변인은 "이를 계기로 불법정치자금, 비자금이 더 이상 이 땅에 발붙일 수 없어야 한다"며 "앞으로 깨끗한 정치, 투명한 경영을 위한 법적, 제도적 개혁에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불입건 조치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었다.
열린우리당도 "정치부패의 원인이었던 정경유착의 일단을 밝혀낸 검찰의 노력과 성과를 평가한다"며 "깨끗한 정치문화 형성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천정배 원내대표는 "검찰의 독립성 보장 차원에서 웬만하면 검찰의 결정에 대해 코멘트하지 않겠다"고 신중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검찰이 잘 결정하지 않았겠느냐"고 평했다.
이평수 수석부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우리당은 수사를 통해 드러난 부패상을 거울 삼아 법제도 정비 등 부패근절을 위해 앞장 서겠다"고 강조했다.
/고주희기자 orwell@hk.co.kr
■한나라·昌 "형평성에 문제"
한나라당은 '면죄부 주기 수사'라고 반발했다. 한선교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승자만 되면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조사도 처벌도 받지 않는 추한 역사로 기록될 것"이라며 "이번 검찰 수사는 '야당죽이기', '정적죽이기'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형오 사무총장은 "천안연수원을 국가에 헌납하고 천막당사로 이전하는 등 몸과 마음으로 사죄하는 것을 보였다"고 밝힌 뒤 "그러나 열린우리당이 어떤 노력과 반성을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여당을 겨냥했다.
이회창 전 총재는 서울 옥인동 집에서 수사결과 내용을 보고받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측근들은 검찰 수사 결과에 대해 "정치적 저의가 있었던 수사"라며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했다.
한 측근은 "8개월간의 수사가 결국 검찰이 권력의 앞잡이로서 정권의 기반을 다지고 열린우리당을 과반수 정당으로 만드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며 "노무현 캠프와 대기업과의 관계는 하나도 밝혀내지 못하고 오로지 한나라당에 초점을 맞춘, 형평성에 대단히 문제가 많았던 수사"라고 비난했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
■재계 반응 "政資法 개혁을"
21일 대검 중수부가 대선자금의 수사 종결을 선언하자 재계는 불법 정치자금 제공 시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며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재계는 특히 기업이 불법 정치자금의 제공처라는 불명예를 털어버리고 새출발할 수 있도록 정치권이 정치자금법을 합리적으로 개정해 기업이 더 이상 정치바람에 휩쓸리지 않게 해 줄 것을 촉구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이날 "검찰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 처벌범위나 수위를 낮춰준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며 "기업인들이 경영활동을 통해 국가발전에 전념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정치자금으로 심려를 끼쳐드린 데 대해 송구스럽다"고 사죄한 뒤 "나라경제가 어느 때보다 어려운 만큼 경기회복을 위해 전력투구 하겠다"고 다짐했다.
삼성그룹은 이학수 구조조정본부 부회장의 불구속 기소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된 데 대해 안도하면서도 "국민이 용인해주고 1년 이상 시간적 여유를 준다면 삼성전자도 수사할 수 있다"는 검찰 관계자의 언급에는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SK그룹 관계자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투명성과 신뢰가 한층 강화하고 화합이 이뤄졌으면 한다"며 "SK는 지배·사업·재무구조 등 3대 구조 개선을 지속적으로 추진, 사랑받는 기업이 되겠다"고 강조했다.
그룹 오너인 김승연 회장이 해외에 체류중이어서 '기소중지 및 입국 시 통보' 조치를 받은 한화그룹은 "현 상황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인 것 같다"며 "김 회장은 현재 몸이 안 좋은 상태이며 회복되는 대로 귀국할 것"이라고 밝혔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기업이 정치권에 정치자금을 주고 나중에 검찰 수사로 곤욕을 치르는 잘못된 관행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며 "아직도 정치권력의 영향력이 지대한 만큼 제도 개혁이 먼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황양준기자 naigero@hk.co.kr
박천호기자 tot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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