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크 아웃마틴 러스 지음·임상균 옮김
나남출판 발행·1만8,000원
함경남도 개마고원에 자리잡은 장진호(長津湖). 압록강 지류인 장진강을 막아 만든 이 댐은 한국전쟁 중 미군 해병대와 중공군 사이에 최악의 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미 해병 1사단 1만2,000명과 중공군 6개 사단 12만명이 맞붙어 중공군 2만5,000여명, 미군 3,000여명이 죽은 사지(死地)다. 이 장진호에서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소련이 벌인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2대 동계 전투이자 한국전쟁의 10대 전투로 꼽히는 싸움이지만 이를 기억하거나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또 한국전쟁 참전자들의 체험을 정리해놓은 자료도 거의 없다. '브레이크 아웃' (원제 'Breakout'·돌파 또는 탈출이라는 뜻)은 그런 면에서도 모범이 될 만한 기록이다.
이 책은 미군의 최정예 부대인 해병대가 10배가 넘는 중공군에 포위돼 전멸의 위기에서 극적으로 탈출하기까지 한달 반의 사투 과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이다. 한국전쟁 말기 미 해병대원으로 참전하기도 한 저자 마틴 러스가 각종 기록을 토대로 사병부터 지휘관까지 전투 참가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생생하게 재현했다.
책은 인천 상륙에 성공한 해병대가 10월 26일 원산에 상륙하여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맥아더 사령부는 워커 중장 지휘 하의 8군은 서부전선에서 평양을 거쳐 북진하고, 알몬드 소장이 지휘하는 10군단 소속의 해병대는 동부 쪽을 밀고 올라가 북한 전역을 장악하려는 전략을 폈다.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던 해병대는 그러나 장진호 부근에서 이미 압록강을 넘어 야간에 이동해온 중공군에 완전히 포위됐다.
성능이 나쁜 소위 '고구마 수류탄'과 일본제 소총 등 형편없는 무기로 무장한 중공군의 유일한 전략은 인해전술. 시체 무더기를 방어벽으로 삼아 끊임없이 밀려드는 중공군을 뚫고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2차대전 경험으로 일당백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노련한 부대원들과 올리버 스미스 사령관의 뛰어난 전략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스미스는 부대가 포위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 포위지역에 지휘소를 차리고 사병들과 생사를 같이 하겠다는 결의를 보여주는가 하면, 하갈리에 비행장을 건설해 탄약과 식량을 보급받을 수 있었다. 이 작전이 후퇴작전이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후퇴라니!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공격중"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전투일지처럼 상세한 상황 설명과 함께 그때그때 참전했던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옮겨놓은 구성은 마치 소설처럼 흥미진진하다. "우리들은 전투가 끝날 때마다 수북이 쌓이는 중공군 시체들을 무더기로 모아놓고 그 뒤에서 바람을 피했고, 텐트를 지급받았을 때에는 그 뒤에 텐트를 쳤어요."(프란시스 맥나이브 일병)
또한 중공군이 던진 수류탄을 자기 몸을 던져 막아 산화한 로켓포 사수 윌리엄 보 일병, 총을 맞아 안구가 튀어나온 상태에서도 소대를 지휘하며 고지를 지킨 얀시 중위 등의 이야기가 눈 앞에 보는 듯하다. 장진호 전투는 중공군 주력부대의 발을 묶어두고, 다른 미군과 국군 부대가 흥남으로 집결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만약 해병대가 무너졌다면 유엔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2001년 미국에서 출간돼 한국전쟁 관련 책 중에서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책이다. 일단 "우리는 한국을 위해 피 흘려 싸워줬다"는 의식을 전제하지 않아 마음에 든다. 다만 시간 순으로 늘어놓고, 개인적 체험을 위주로 구성함으로써 나무만 보고 산을 보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장진호 전투를 다룬 책으로는 조지프 오웬의 수기 '지옥보다 더한 추위', 제임스 브래디의 소설 '가을의 해병'이 있고, 퓰리처상 수상작가인 W. E. B. 그리핀이 한국전쟁 당시 해병대 전투를 소재로 쓴 '후퇴'가 올해 초에 나왔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맥아더 말 따랐다면 기적은 없었을 것", 연락장교 참전 이종연씨
이 책에는 당시 미 해병 1사단 본부 연락장교인 한국인 존 Y 리(이종연·76·사진) 중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실제 주인공인 이씨는 종전 후 예일대 법대를 졸업하고 미국 법무부에서 근무하다 1999년 귀국, 인천국제공항 법률고문을 거쳐 현재 한 로펌의 고문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2학년 재학 중이던 1950년 부산에서 입대한 그는 "어항에 들어있는 고기 신세 같았던 상황에서 빠져 나온 게 기적"이라며 "단일 전투에서 미국 대통령이 수여하는 무공훈장이 17개나 수훈된 것을 볼 때도 전무후무한 전사 기록"이라고 말했다. 스미스 사령관을 옆에서 지켜보았다는 이씨는 "그는 매우 신심이 두텁고 겸손하면서도 뚝심이 있는 사람이었다"며 "만약 그가 맥아더와 알몬드 사령관의 말을 그대로 들었더라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1983년 조직된 생존자협회 '초신 퓨(Chosin Few·장진의 일본어 표기를 옮긴 영어로 당시 생존자가 아주 적었다는 의미)'의 창설 멤버로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올해 여름에는 사법연수원에서 미국법을 강의하고 미국형사재판제도에 대한 저서도 낼 예정이다. /최진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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