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폐허에서 온 나라가 신음하던 1954년 6월 1일, 열두 살 소년 한동일은 부푼 꿈을 안고 미국행 군용기에 올랐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주한 미5공군 사령관 새뮤얼 앤더슨 중장의 군용기였다. 서울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한 비행기가 뉴욕에 내렸을 때, 미국 언론들은 전쟁과 가난에 지친 작은 나라에서 온 음악 신동의 도착을 대서특필했다.앤더슨 중장의 후원으로 명문 줄리어드 음악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소년은 11년 뒤 레너드 번스타인이 심사위원장을 맡은 리벤트리트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먹고 살기도 힘들던 그 시절 한국인들에게 이 소식은 자랑스런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현재 보스턴대 교수(피아노과 과장)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한국의 음악신동 1호이자 해외진출 음악가 1세대를 대표하는 한동일(사진)이 서울에서 도미(渡美) 50주년 기념 음악회를 한다. 반 세기 전 바로 그날인 6월 1일 오후 7시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서울시향과 협연한다. 김대욱(울산시향 상임지휘자)이 지휘하는 이날 공연은 한동일이 미국에서 처음 본 서양 오케스트라 연주회의 감동을 그대로 재현한다.
"뉴욕의 루이슨 스타디움에서 열린 뉴욕필 연주회였는데,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을 받았죠. 그날 들었던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과 피아노협주곡 4, 5번으로 이번 공연을 구성했어요. 서울시향의 팀파니 주자이셨던 아버지와 함께 연주하는 자리라 더욱 기쁘고 감개무량합니다."
그의 부친 한인환(91)씨는 서울시향 창립멤버로 1970년 은퇴할 때까지 몸담았다. LA에 살고 있는 부친은 구순을 넘긴 지금도 매일 2시간씩 테니스를 칠 만큼 건강하다.
한동일의 미국행은 지금 돌아보면 꿈만 같은 일이었다. 집에 피아노가 없어 서울대 의대 자리에 있던 미 5공군 사령부 강당의 피아노로 연습하던 어린 한동일은 미군의 요청으로 무대에 올랐는데, 그 연주를 본 앤더슨 중장이 후원자로 나섰다. 앤더슨 중장의 주선으로 그는 주한 미공군 부대를 돌았고 일본 오키나와 주둔 미군기지에까지 가서 연주했다. 미군 병사들이 철모를 돌려 한푼 두푼 모아준 5,000달러로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제가 복이 참 많지요. 어린 나이에 부모를 떠나 혼자 살아야 했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10대 소년 시절부터 여기저기 다니며 연주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접시 닦으면서 고학하는 사람들보다는 나았다고 할 수 있죠.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요즘은 세계 무대를 누비는 우리 음악가들이 많아서 무척 기뻐요. 그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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