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1년 5월21일 프랑스 정치가 레옹 부르주아가 파리에서 태어났다. 1925년 몰(沒). 30대에 급진당 소속으로 정계에 들어간 부르주아는 여러 차례의 장관직과 총리, 상원의장을 거치며 프랑스 제3공화국 정치를 주도했다. 그는 단순히 기능적 정치인이 아니라 실천적 사회철학자이기도 했다. '연대의 철학'(1902)에서 자신이 제창한 사회연대론(solidarisme)을 부르주아는 집단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러니까 부르주아는 영국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제3의 길'을 제창하기 한 세기 전에 똑같은 용어로 집단과 개인의 조화를 꾀한 셈이다.그러나 토니 블레어의 이른바 '뉴레이버'(신노동당)가 실천하고 있는 '제3의 길'에 견주면, 부르주아의 '제3의 길'은 한결 왼쪽에 있었다. 부르주아는 자신의 사회연대론을 정책에 적용해 노동자 연금 제도를 강화하고 중등교육을 민주화하고 국제연맹 창설을 주도하는 등 국제주의적 민주주의자의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그가 세계 여러 곳에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주의 국가의 지도자였다는 사실 또한 엄연하다. 부르주아는 국제연맹 창설에 대한 기여를 인정 받아 192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정치적 좌파의 어휘집에서 '부르주아'(bourgeois)라는 프랑스어는 일종의 욕설이다. 본디 '부르(bourg: 성이나 도시)에 사는 사람' 곧 도시민을 가리켰던 부르주아는 자본주의의 개화와 함께 귀족(nobles)·촌민(manants)의 대립어에서 노동자(ouvriers 또는 proletaires)의 대립어로 변하면서 '(착취하는) 자본가'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고, 낭만주의자들이 이 계급에 대한 저항을 예술가의 임무로 받아들이면서 심미적 가치에 대한 몰취향을 상징하게 되었다. 오늘의 주인공 레옹 부르주아는 그래도 썩 괜찮은 부르주아였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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