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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프리가 만난 사람-경남 하동 새미골…막사발 도공 장금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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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프리가 만난 사람-경남 하동 새미골…막사발 도공 장금정씨

입력
2004.05.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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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셔야 이야기가 돌아요. 자, 이렇게 80번을 저어서 물의 온기가 사발의 통해 둘째 손가락으로 전해질 때쯤 손님에게 두 손으로 드리죠."한 차례 봄비가 지나간 늦은 밤의 가마터. 가루차를 섞는 찻솔이 투박한 사발을 만나는 소리가 여도공(女陶工) 장금정(65)씨의 목소리와 어우러져 부드러운 고요를 적신다.

"우리나라의 차 문화는 숭늉 문화에서 시작됐지요. 그 다음이 미숫가루고…. 그래서 사발은 머그잔이나 종이컵보다 우리에게 가깝게 느껴집니다. 커피나 주스를 사발에 마셔보세요. 얼마나 편안한지 몰라요."

'투박하고 어수룩하고 소박한 미'

1974년 홀로 두 남매를 옆구리에 끼고 고향인 경남 사천 30리 밖 하동 지리산 자락의 '새미골 가마터'로 들어온 장씨는 30년 동안 사발 하나에만 매달려 온 고집스러운 도공이다. 사발, 그리고 거기에 담긴 삶의 이야기를 들으러 찾아간 기자에게 그녀는 차 이야기로 운을 뗐다.

"물과 그릇과 차가 어우러지고 거기에 손 끝의 기운과정성이 더해지면 손님에게 이로운 차가 되지요. 우리 흙으로 빚은 사발은 물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우물에서 퍼온 물을 사발에 몇 시간 담가 두었다가 마시면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요." 상에 놓인 큼직한 사발에서 표주박으로 떠 권하는 물 한잔이 정말 달다.

장씨는 사발의 멋을 '투박하고 어수룩하고 소박한 미(美)'라고 정의했다. 땅을 파서 그릇을 빚을 수 있는 흙을 찾아내고 그것을 체에 친 후 발로 밟아서 반죽한 후 모양을 내 참나무와 소나무를 섞어 불을 떼 가마에 구워낸다. 아무리 공을 들여도 불이 마지막으로 도와주지 않으면 제대로 된 그릇이 나오지 않는다.

"여자도 너무 예쁘면 매력이 없잖아요. 나처럼 수더분하고 편안하게 생겨야 좋지. '투박하고 어수룩하고 소박한' 사발을 만들려면 만드는 이는 욕심이 없어야 해요. 사심 없이 흙에 순응해야 좋은 사발이 많이 나와요."

30년 사발을 만들어왔지만 아직도 가마를 열 때면 어떤 그릇이 나올지 설렌다. 몇 놈은 덜 익고, 몇 놈은 까맣게 타버린 중에 다소곳이 도공을 기다리는, 제대로 된 그릇 몇 점이 늘 반갑다. 한 번 가마에 들어가는 사발 수를 묻는 기자에게 그녀는 "그걸 세기 시작하면 사발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며 웃는다.

장씨는 잘 된 사발을 잘 골라 모아두었다가 10년에 한 번씩 전시회를 갖는다. 가장 최근의 전시는 사발 120여 점을 모아 4월21일부터 5월4일까지 인사아트센터에서 열었다. 7월에는 '나라사랑 어머니회' 초청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문화원에서도 전시회를 한다. 여기에 5월20일부터 23일까지 새미골 차사발을 직접 빚어볼 수 있는 '하동 야생차 문화축제' 준비까지 해야 하니 한 시도 숨 돌릴 틈이 없다.

언제 어디서든 편해서 '막사발'

흔히 사발을 부르는 '막사발'이라는단어에 대해 장씨는 매우 긍정적이다. 사발을 무시하거나 낮게 보려는 말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쓸 수 있는 그릇'이라는 뜻이 더하기 때문이다.

"밥에 나물과 고추장을 넣고 쓱쓱 비벼 다섯 식구 숟가락을 함께 넣어 나눠 먹던 그릇도 사발이지만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 차를 내던 잔도 사발입니다. 스님들은 사발에 산에 나는 칡꽃을 따다 말려 귀하게 마시기도 했지요. 어디에 두어도 도드라지지 않고 편안하고 수더분한, 우리네 어머니 같은 그릇이 바로 '막사발'입니다."

차실 아래 놓인 넓은 나무 마루에는 사발 200여 개가 뒤집어진 채 놓여있다. 가마에 들어갈 때 열판에 붙지 못하게 발에 붙여둔 흙받침도 떼어내지 않은 채다. 가마에서 나온 사발이 모두 다른 모양새를 뽐내며 '잘만들어진 사발'로 선택되길 기다리는 시간은 장씨에게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이다.

"여기서 잘된 놈을 골라내야 합니다. 보세요, 이렇게 빛깔이 곱잖아요. 뒤집어 봐서도 빛깔이 좋고 갈라진 곳이 없어야 해요. 그렇지만 서양 자기처럼 터진 구석이 하나 없어도 좋은 사발이라고 할 수 없어요. 사춘기 소녀 여드름마냥 자연스러운 구멍이 군데군데 나있어야 좋지요."

옆 선반에는 또 다른 사발들이 엎어진 채 말려지고 있다. 손님이 올 때마다 차를 대접한 사발을 젖은 행주로 닦아내고 3주 동안 볕을 쐬어 말린다. 사발은 잡는 사람의 기운이 스미는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다른 이에게 대접할 수 없다는 장씨의 고집이 엿보인다.

어머니의 사발에 대한 정신은 딸 정주령씨가 이어받았다. 어머니에게 배운 후 중국과 일본을 10년간 돌며 그들의 기술을 배우고 우리의 기술을 전하다가 지난해 돌아왔다. 사발만 만들 뿐, 도통 돈 버는데 관심이 없는 어머니를 위해 서울 인사동에 작은 전시·판매관도 마련했다.

장씨의 소망은 온 국민의 밥상에 사발이 오르고 모두가 그 아름다움에 즐거워하는 것이다.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물레, 가마에 식당까지 갖춘 도자 학교도 만들었다. 지금은 지붕만 덮었지만 곧 번듯한 건물로 다시 세울 예정이다.

"30년 동안 사발만 만지고 있으니 사람들이 제 모습이 사발과 닮았다고 하대요. 새가 우는 소리, 대가 스치는 소리, 연꽃 밭에서 날아오는 은은한 향기…. 새미골 사발은 지리산의 기운을 담고 있어요. 별만 떠있는 깜깜한 밤, 정겨운 이와 사발에 차를 담아 마셔보지 않은 사람은 삶의 즐거움 하나를 모르고 지나가는 겁니다."

/하동=김신영기자 ddalgi@hk.co.kr

■지리산 기슭 새미골 200년된 초가, 취화선 무대 되기도

지리산 기슭 새미골에 자리한 집들은 모두 200년 전 초가를 조금씩 고친 것들이다. 장씨가 손님을 맞는 넓은 차실도 우사(牛舍)를 개조한 것으로 키가 큰 이는 고개를 숙여야 들어설 수 있다. 이 중 한 채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에서 장승업이 술병을 들고 그림을 그리던 작은 방으로 쓰였다. 이 밖에도 텔레비전 드라마 '다모'와 '대장금'에서도 장씨의 사발을 만날 수 있었다. "대장금에서는 장금 역의 이영애가 너무 예뻐서 수더분한 사발이 오히려 잘 어울렸죠."

"사발을 손이나 수저로 두드려 보세요. '쨍'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아니라 바가지 소리가 납니다. 그게 바로 한국 사람, 특히 한국 남성의 심성이에요. '자기야, 사랑해'보다는'밥 묵었나'에 가깝다고나 할까요."

우리 나라에서 사라져간 사발은 오히려 일본에서 '이즈미무라(井戶) 차완'이라는 이름으로 국보급 대우를 받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새미골에서 사발을 빚던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면서 가마의 불은 꺼져야 했다.

"'이즈미 무라'라는 말 자체가'새미' 즉 샘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많아요. 새미골은 하늘에서 본 모양이 깊이 파인 샘과 닮아서 지어진 이름입니다. 또 사발의 모양새 자체가 샘을 닮았다는 거예요. 일본 사람들은 사발이 '산 우물이 솟아 나오는, 용수천 같은 샘 모양'이라고 말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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