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개각을 앞당기기 위해 이미 사의를 표명한 고건 총리로부터 각료 임명제청을 받기로 한 것은 적절치 않다. 헌법에 위배된 것은 아니지만 헌법정신을 명백히 훼손하기 때문이다. 헌법 87조 1항은 "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돼 있다. 총리가 행정각부를 통할 할 수 있도록 명실상부한 제청권을 주자는 게 헌법 정신이다.물러날 총리가 각료제청권을 행사하는 것은 여러 차례 논란이 돼 왔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때 국회가 김종필 총리 임명동의안을 처리하지 못하자, 김영삼 정부의 마지막 총리였던 고건 씨가 '국정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라는 양해아래 제청권을 행사했던 게 대표적 예다.
이에 앞서 노태우·김영삼 정부 때도 내각 총사퇴와 대폭개각이 있을 때마다 총리가 제청권을 제대로 행사했느냐 하는 논란이 거듭돼 왔다. 매사를 원칙대로 하겠다고 다짐한 참여정부아래서, 고건 총리는 제청권을 문서로 행사하는 등 제도화를 위해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돼 있다.
노 대통령이 직무 복귀 후 산적한 국정현안을 빨리 추스르고, 국정의 조기안정을 위해 개각을 서두르는 것은 이해가 간다. 사실상 총리에 내정된 김혁규씨의 임명동의가 한나라당의 반대로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정황도 개각을 앞당기는 데 일조 했을 것이다.
하지만 급하다고 해서 헌법 정신을 훼손하는 처사는 용납할 수 없다. 이번 개각은 노 대통령이 헌재의 탄핵심판 후 실시하는 첫 인사다. 헌재는 노 대통령에게 "헌법을 경시하는 대통령은 스스로 자신의 권한과 권위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라고 준엄한 충고를 했다. 국회에서 임명동의를 받은 새 총리의 제청을 받아 개각을 하는 게 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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