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은 축복이자 저주이다. 어느 분야건 한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에겐 더 말할 나위 없다. 한국 영화계의 거목 임권택 감독이라고 예외일 순 없다.‘하류인생’의 최대 굴레는 다름 아닌 감독의 명성이다.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밖에 없는, 어떤 기대감이 영화의 재미 내지 감흥을 심각하게 방해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론 그 굴레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영화를 보고 싶었다. 임권택-이태원-정일성 ‘노장 트리오’가 작정하고 대중영화 한번 만들자고, 그래 ‘젊은 놈들’(?) 부럽지 않게 돈 좀 벌어보자고 착수한 프로젝트란 걸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지라 지나친 기대로 인해 영화 보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영화는 제법 즐길 만했다. 자유당 정권 말기인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유신 체제가 들어선 뒤 몇 년 후까지의 격변, 질곡의 시대사 속에서 ‘건달’ 최태웅(조승우 분)을 중심으로 한 개인사들이 그야말로 파란만장하게 펼쳐졌다.
우려와 달리 조승우의 열연이 단연 돋보였다. ‘춘향뎐’(2000)과 ‘클래식’(2003)의 ‘왕자 이미지’를 보란 듯 떨쳐내고 말 그대로 ‘하류인생’의 거친 삶을 표현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끝내 대역을 마다하고 직접 해냈다는 실감 액션도 휴먼 액션 드라마로서의 정체성 형성에 톡톡히 한 몫 한다.
친구의 누나에서 처로 나아가는 혜옥 역 김민선의 연기도 합격감이다. 당시의 억척스러운, 때론 현명한 우리네 여인상을 만족스럽게 현실화했다. 특히 표정 연기가 뛰어나다. 그들의 30대 연기나, 세트란 사실을 너무나도 명백히 상기시키는 장면화(미장센) 등이 다소 어색하긴 했으나, 영화적 관습에서 판단했을 때 큰 문제될 게 없었다.
안타까운 건 시대사에 대한 감독의 욕심 탓에 드라마틱한 개인사는 적잖이 빛이 바랜다는 사실이다. 속도감 넘치는 편집 템포에도 불구하고 수준급 완급의 리듬감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건 그 탓이다. 그 결과 성찰적 거리감은 유지되지만, 대중영화에 필수적인 극적 몰입이 불가능해진다. 영화를 보는 내내 ‘장군의 아들’이나 ‘서편제’가 아닌 ‘태백산맥’이 자꾸 떠오른 건 그 때문이었으리라.
한편 물경 2억 달러 가까운 거액을 투하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자유롭게 리메이크해 빚어냈다는 ‘트로이’(감독 볼프강 페터슨)는 ‘철저한’ 할리우드 액션 블록버스터이다. 칸 영화제 기자 회견-비경쟁작으로 초청돼 13일 성황리에 선보였다-에서 감독이 밝힌 바처럼, ‘피’와 ‘땀’을 원했다는데 그 것이 성공적으로 구현됐다.
브래드 피트(아킬레스), 올란도 블룸(파리스), 에릭 바나(헥토르), 션 빈(오디세우스), 브라이언 콕스(아가멤논) 등 화려한 진용이 대거 동원됐으니 혹하지 않으면 외려 이상하리라. 할리우드 영화가 무조건 질색이라면 몰라도….
/ 전찬일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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