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로열 뱅크 오브 스코틀랜드(Royal Bank of Scotland·RBS)는 지난 5일 미국내 중서부를 영업기반으로 하는 차터 원 은행(Charter One Financial)을 총 105억달러(주당 44.50달러)에 현금매입키로 했다고 발표했다.영국내 2위은행인 RBS는 2002년 메드포드 방코프(2.8억달러), 2003년 포트 파이낸셜(3.1억달러), 올 3월에는 피플스 뱅크 브리지포트의 신용카드부문(3.6억달러)을 잇따라 사들인 바 있다. RBS는 이번 차터 원 인수를 통해 중부 및 북동지역 13개주에 1,400개의 점포를 확보, 미국 10대 시중은행 안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최근 세계 인수합병(M&A) 시장에서 유럽기업의 미국기업 사냥에 가속도가 붙고 있다. 유럽시장의 한계와 까다로운 M&A조건 및 미국시장에 대한 매력 탓도 있지만, 지난해 이래 달러화 약세(유로화 강세)로 인수비용이 그만큼 저렴해진 것이 주된 이유다. 최근 1년간 달러화는 유로화에 대해 15%가량 절하됐기 때문에 유럽기업은 보다 적은 비용으로 미국기업을 사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올해 초 미국내 3위 이동통신업체인 AT&T 와이어리스 인수전에 영국의 보다폰이 총공세를 펼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달러화 약세 때문이었다. AT&T 와이어리스의 인수가는 당초 300억달러 정도로 예상됐지만, 보다폰은 유로화 강세를 바탕으로 380억 달러→400억 달러 식으로 매입호가를 높여갔다. 최종 승리는 미국내 2위업체인 싱귤러에게 돌아갔지만, 보다폰의 '풀 베팅' 때문에 300억달러짜리 AT&T 와이어리스의 낙찰가격은 410억달러까지 높아졌다.
유럽계 금융기관들의 미국은행 인수도 늘어나는 추세다. RBS외에 지난해 3월엔 영국계 HSBC가 미국의 하우스홀드 인터내셔널 은행을 145억 달러에 매입했다. BNP파리바, ABN암로 등도 2∼3년전부터 미국계 금융기관 인수에 팔을 걷어붙인 상태다.
달러화 약세는 미국기업을 인수한 유럽기업에게 뜻밖의 횡재를 안겨주기도 했다. 세계적 생활용품 및 식품그룹인 네덜란드계 유니레버는 지난 2000년 미국의 베스트푸드를 240억달러에 인수하면서 막대한 부채를 짊어져야 했다. 그러나 달러화 가치가 떨어짐에 따라 유니레버는 실질부채가 50억달러이상 감소했고, 주주들로부터 '이익을 돌려달라'는 행복한 압력을 받았다.
M&A 전문가들은 "기업 경영진이 환율에 근거해 전략을 수립하지는 않아도 M&A시기와 가격을 결정하는데 환율은 무시할 수 없는 변수로 작용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최근 미국경기회복과 조기금리인상 가능성으로 달러화가 상대적 강세반전을 시도하고는 있지만, 미국의 쌍둥이 적자 문제가 남아있는 한 달러화의 펀더멘털은 약세일 수 밖에 없고 유럽 기업들의 미국기업 사냥시도는 더 많아질 것이란 관측이다.
환율변화가 유럽기업에 행운을 안겨주는 만큼, 미국기업에는 불운을 안겨주고 있다. 한때 유럽기업 인수에 적극적이었던 미국 기업들은 달러화 약세로 인수비용이 높아져 유럽기업 사냥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2003년10월 미국의 제네럴 일렉트릭(GE)은 영국의 의료기기생산업체인 아머샴을 57억파운드(106억달러)에 인수키로 합의했다. 그러나 영국 파운드화에 대해 달러화 가치가 급락함에 따라 GE는 3억달러 이상의 추가비용을 지불해야 할 형편이다.
지난 2월말 미국 최대 주택자재 판매업체인 홈 디포가 영국의 대형유통회사인 킹 피셔를 인수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홈 디포의 로버트 나델리 회장은 "최근의 환율을 감안하면 유럽기업 인수를 위해 자금을 동원할 여력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미국의 유럽기업 인수를 어렵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인은 '유럽주의'의 부흥조짐이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17일 "미국기업들의 유럽기업 인수시도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가 독일에 '원군'을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프랑스와 독일이 힘을 합쳐 미국의 초대형 다국적 기업과 겨룰 '대항마'를 키우기로 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미국 방산업체인 원이퀴티가 세계 최대의 비핵잠수함 제조업체인 독일 HDW사 인수에 관심을 보이자 양국은 해양방위산업을 아예 합치는 방안을 논의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프랑스 롱플랑과 독일 훽스트가 합병을 통해 세계 3위의 제약회사 아벤티스를 탄생시킨 것이나 양국의 우주항공업체가 세계 2위의 EADS사로 합병된 것 모두 미국기업에 대한 견제차원이란 분석이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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