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전자산업의 메카로 불리는 구미공단내 LG필립스LCD 제4공장 앞에는 2년전만 해도 3,000평에 달하는 넓은 녹지가 있었다. 언뜻 보기에 잔디밭처럼 보이지만 실제 심어져 있는 것은 특이하게도 잔디가 아니라 보리였다. 회사 직원들 사이에서 '눈물의 보리밭'으로 불리는 이 곳에는 가슴 찡한 사연이 있다.이 공장이 완공된 2001년은 세계 IT(정보기술)시장의 버블 붕괴로 LCD 가격이 폭락하면서 위기감이 한껏 고조되던 시기였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이 불안한 상황에서도 투자를 강행한 회사측은 다른 비용지출만큼은 최소화하기 위해 잔디밭이 들어서야 할 자리에 대신 보리밭을 조성한 것이다.
이듬해 수확된 보리는 협력업체를 포함한 전직원에게 조금씩 나눠졌다. 보리쌀에 동봉된 짤막한 CEO의 편지는 "우리의 눈물이 젖어있는 보리쌀을 보면서 어려웠던 시절의 아픔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 해 숙적 일본을 제치고 세계시장 점유율 1위로 올라선 LCD산업은 지난해 수출로 109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달러박스가 됐다. 보리밭 자리에는 요즘 새 LCD공장 건설이 한창이다.
새삼 흘러간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지금 우리 경제가 그 같은 도전적 기업정신과 과감한 투자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투자는 미래에 대한 저축이다. 투자가 없으면 미래가 없다. 그러나 요즘 우리 기업들은 돈을 벌어도 투자는 하지 않은 채 현금으로 쌓아두거나 빚갚기, 자사주 사기에 열중하고 있다. 지난해말 기업들의 현금비축은 60조원대로 사상최대 규모라고 한다.
기업들이 이렇게 투자를 기피하는 속사정에 대해 한 재계 인사는 "요즘 오너들 머리 속에는 경영권 생각밖에 없는 것 같다"고 설명한다. 지난해 소버린 사태이후 경영권 방어는 재계의 최대관심사로 등장한 게 사실이다. 정체도 분명치 않은 외국계 펀드가 1,700억원을 투자해 외형 50조원의 SK그룹을 흔드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다른 재벌 총수들이 느꼈을 불안과 충격은 충분히 짐작할만하다.
상호·순환 출자를 통해 모든 계열사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방식으로 소수 지분만으로도 그룹 전부를 지배하는 것이 한국적 재벌구조의 특징이다. 그러나 총수의 그룹지배를 손쉽게 보장해온 이 장치가 국내 상장사에 대한 외국인의 지분이 절반을 넘어선 요즘에는 경영권 불안이라는 부메랑이 되고 있는 것이다.
기업의 지배구조를 투명화, 선진화하는 재벌개혁은 시대적 요구이다. 그러나 모든 개혁이 그렇듯, 성공의 열쇠는 기업이 개혁을 받아들이도록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스스로 변화에 나서도록 길잡이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벌개혁에 대한 분명한 정책방향이 제시돼야 하고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경영권이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경영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조치들은 가능한 한 신중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재벌 금융계열사에 대한 의결권 제한 조치로 삼성전자가 적대적 인수합병에 노출될 수 있다는 주장은 당장 현실성이 없다 하더라도 가능성만으로도 기업은 위협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경영권 불안으로부터 기업을 자유롭게 해주는 일은 지금 가장 효과적인 투자촉진책이다.
/배정근 부국장겸 경제부장 kp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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