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등불을 밝혀줄 영웅은 누구인가? 이순신 장보고 장길산 정주영 이병철…. 몸을 던져 세상을 구하고 풍운에 맞섰으며, 혁명을 꿈꾸고 갑부의 꿈을 이룬 지난 시대 영웅들이 TV 드라마로 돌아온다. 사극 '대장금'부터 30대 미혼 여성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경쾌하게 그려낸 '결혼하고 싶은 여자'까지, 한동안 여성 주인공들과 밀월을 나누던 드라마가 이번에는 앞 다투어 남성 영웅들을 불러내고 있다.
'군웅할거 드라마'를 먼저 연 것은 SBS. 17일부터 황석영 원작 '장길산'(월·화 밤 9시 55분)을 선보였다. 장길산은 조선 숙종때 황해도 구월산에 실존했던 인물로 광대패 등 천민들과 운부 대사를 중심으로 한 승병 세력, 근기지방(近畿地方)의 여환을 중심으로 한 미륵신앙 교도들과 힘을 합쳐 새 세상을 건설하려 했다.
드라마 '장길산'은 썩은 세상을 허물어 버리고 새 세상을 도모하려 했던 '혁명아'의 일대기를 그려낸다. 장형일 PD는 "많은 사람들이 '개혁'을 이야기하는 이때 기성의 잘못된 제도와 부패정권을 뒤엎고자 했던 장길산은 여전히 필요한 인물"이라고 의미를 정의했다. 지금 우리사회에 필요한 '시대정신'을 개혁과 체제 변화에 맞추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7월 중순부터 SBS '장길산'과 같은 시간대 맞붙을 예정인 MBC '영웅시대'가 고(故) 정주영·이병철 회장의 일대기를 다룬다는 것. 드라마의 이름에 아예 '영웅'이란 두 글자를 못 박은 이 드라마는 정주영 회장을 모델로 한 천태산(차인표)과 이병철 회장을 모델로 한 국대호(전광렬)의 삶을 통해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경제 발전의 전말을 담아낸다. '장길산'과 달리 우리 현대사의 '자본주의 신화'인 경제인을 영웅으로 제시한다.
이들은 IMF이후 '사농공상'의 유교적 신분질서에 대한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 '부자를 존경하게 된' 한국 사회가 새롭게 제시하는 영웅상이다.
신호균 CP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려운 이 시기에 영웅이 필요하다면 바로 한국경제를 이끌고 있는 기업을 일군 사람들일 것"이라며 "그들의 기적 같은 이야기를 통해 '이태백'이라 불리는 청년들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중·장년층은 향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벌 미화'라는 비판을 의식한 듯 "재벌 드라마가 아니다. 정주영·이병철 회장으로부터 모티브를 얻었지만, 이환경 작가의 상상력과 다른 경제인들의 에피소드가 섞인 새로운 이야기"라며 "두 주인공 뿐 아니라, 이들과 함께한 임원이나 현장 노동자들의 이야기도 곁들여진다"고 설명했다.
일찌감치 '용의 눈물' '태조 왕건' 등을 통해 남성적 영웅상을 드라마화하는데 앞장서온 KBS도 창사 이래 최대의 물량을 투입해 '불멸의 이순신' 제작에 나섰다. 광복절을 하루 앞둔 8월14일 첫 방영될 '불멸의 이순신'은 탄핵기간 중 노무현 대통령이 읽어 화제가 된, 소설가 김훈씨의 '칼의 노래'와 김탁환씨의 '불멸'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국운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왜군과 싸워야 하는 이순신의 삶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충무공이 체제 전복을 꿈꿨던 장길산과는 달리 자기 몸을 던져 체제를 지켜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대비된다.
연출을 맡은 이성주 PD는 "영국을 지탱하는 힘이 기사도 정신이고 일본이 사무라이 정신이라면, 우리에겐 '이순신 정신'이 있다"며 "백성과 부하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고 아꼈던 충무공의 '백의종군' 정신이야 말로 이 시대에 필요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한국사회를 이끌고 나갈 새로운 리더십을 이순신의 일대기를 통해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KBS는 소설가 최인호 원작의 '해신'도 선보일 예정. 한·중·일 3국의 사이에 치열한 경제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신라말기 해상무역을 독점했던, '국제무역가' 장보고 장군의 생을 통해 해법을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지상파 방송 3사가 모두 드라마에서 영웅상을 그리려는 것은 한국사회의 혼란상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문학평론가인 공임순씨는 "원칙과 대의가 통용되지 않는 부패한 질서, 무한경쟁 속에 내던져진 대중은 이런 혼란과 분열을 극복하고 정도(正道)가 구현되는 세상을 열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를 희구하게 마련"이라고 분석했다. "강력한 지도자의 지배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고자 하는 대중의 집단적 무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TV가 신라시대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의 한국역사 속의 '영웅'들을 팔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난세란 말인가?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 3사 영웅드라마 특징
KBS는 정사, SBS 야사, MBC는 개인 성공담.
드라마를 통해 영웅 그리기에 나선 지상파 방송 3사의 방향을 단순화하면 이쯤 되지 않을까.
이중에서도 정체성이 두드러진 곳은 '장길산'으로 영웅 드라마의 불을 댕긴 SBS다. SBS는 1996년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드라마로 선보였고 98년에는 '홍길동'을 제작한 적이 있어 이번 '장길산'을 통해 조선 3대 의적을 모두 드라마화하는 기록을 세웠다. KBS가 '용의 눈물'을 시작으로 '왕과 비' '태조 왕건' '무인시대' 등 정사 위주의 사극을 선보이고 '불멸의 이순신'을 방송키로 한 것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에 대해 주철환 이화여대 영상학부 교수는 "공영방송인 KBS는 정사를 다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듯하고 KBS, MBC 양 방송사 체제를 흔들며 출발한 SBS는 야사 위주의 사극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시청료를 통한 재원 확보가 가능한 KBS와, 상업방송으로 광고료 수입에 의존하는 SBS의 차이로 볼 수도 있다. SBS는 정사는 스케일이 크고 투자비가 많아 돈이 덜 드는 야사를 선택한다는 것.
실제 KBS는 사극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스펙터클을 연출하기 위해 100부작 '불멸의 이순신'에 드라마 사상 최대인 350억원을 들일 계획이다. 이를 위해 거북선 실물 2척을 건조하고 조선·명·왜의 무기와 갑옷을 새롭게 제작하는 등 미술과 세트 비용에만 50억원을 투자한다. KBS 아트비전은 전북 부안군과 공동으로 조선시대 궁궐과 사대부가, 공방촌이 들어선 '부안 영상 파크'를 건설중이다. 면적 4만5,000평 규모에 사업비 190억원이 소요되는 대공사이다. 물론 SBS도 충남 태안에 장길산 세트를 짓고 있지만 이는 건설업체가 세트를 포함한 종합 리조트를 건설하면서 세트 건설비 40억원을 전액 출자키로 한 것이어서 KBS와 차이가 있다.
'허준' '상도' '대장금' 등을 통해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의관, 상인, 여성의 성공담을 보여준 MBC는 '새로운 영웅 만들기' 공식을 다시 한번 선보인다. 부정적 이미지가 엄존하는 재벌 총수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는 드라마 '영웅시대'를 방송키로 한 것이다.
KBS, SBS가 기존 체제에 맞서고, 새로운 사회 질서를 만들려다 쓰러져간 '비극적 영웅상'을 그리는 것과 달리 MBC는 자본주의 질서에서 부를 축적한 기업인들에게 과감하게 '영웅'이란 칭호를 부여하는 '틀 깨기' 전략을 구사한다.
/김대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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