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5월20일 오후 3시30분께 서울대 농과대학생 이동수가 서울대 학생회관 4층에서 제 몸을 불사르며 투신했다. 몸을 날리기 전 그가 남긴 마지막 외침은 "파쇼의 선봉 전두환을 처단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교정에서는 오월제 행사의 일환으로 문익환 목사의 강연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동수는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지던 도중 오후 4시께 운명했다. 24세였다. 이동수는 1983년 이 대학 원예학과에 입학한 뒤 곧바로 군에 입대해 두 해 반 뒤에 제대한 복학생이었다.이동수는 1980년 봄 광주 학살 이후 해마다 5월만 되면 파쇼 정권 타도를 외치며 스러져간 수많은 젊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 젊은 죽음의 리스트 맨 앞에 기록된 이름은 김의기일 것이다. 1980년 봄의 학살을 현장에서 목격한 서강대 무역학과 학생 김의기는 그 해 5월30일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뿌리며 투신했다. 21세였다. 그의 유서가 돼버린 이 유인물은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홧발 소리가 우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 안방까지 스며들어 우리 가슴팍과 머리를 짓이겨 놓으려고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절박한 호소로 시작한다.
한 해 뒤인 1981년 5월27일에는 서울대 경제학과 학생 김태훈이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서울대 도서관 6층에서 몸을 던졌다. 22세였다. 그 뒤로 수많은 5월의 젊은 죽음이 잇따랐다. 가장 많은 죽음을 목격한 5월은 광주 학살 열한 돌을 맞은 1991년 5월이었다. 그 해 4월26일 명지대 경제학과 학생 강경대(당시 20세)가 시위 도중에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죽은 것을 시작으로 5월25일 성균관대 불문학과 학생 김귀정(당시 25세)이 역시 시위 진압 와중에 숨지기까지 한 달 사이에 열한 명의 꽃다운 목숨들이 스러졌다.
고종석/논설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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