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사람 복싱 前세계챔피언 김태식"내가 모자라는 놈이니까 살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미 미치거나 죽어버렸겠죠." 그 동안 사람들에게 수 없이 당하고 보니 볼품없고 몇 푼 못 벌어도 지금 이 생활이 행복하다고 한다. "복싱계가 의리가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내가 바보 같고 편하니까 후배들이 이 구석까지 찾아 오고요."
면목동 동부시장 곱창골목에서 부인과 둘이 청소하랴, 연탄불 갈랴, 고기 접시 나르랴 정신이 없는 '불타는 껍데기'집 주인 김태식(46).
벽에 붙어 있는 챔피언 시절의 사진이 아니면 그가 왕년의 '돌주먹' 김태식 임을 알아 차릴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지금이라도 차려 입고 나가 괜찮다는 사람들과 어울리면 먹고 사는 것은 걱정 없겠지만 이제 와서 인생의 남은 3분의 1을 편하게 살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화려했던 과거와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떨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열심히 살겠다는 그는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격차가 너무 커 지는 게 문제다. 여기는 서민 동네라 정말 장사가 안 된다"며 정치하는 사람들을 원망하기도 했다.
77년 신인왕전 최우수선수 출신으로 80년 2월 WBA 플라이급 챔피언 루이스 이바라(파나마)를 2회 1분11초만에 눕히고 왕좌에 올랐던 김태식.
4분11초 동안 무려 221개의 펀치를 날리며 팬들을 열광시킨 그는 그 해 6월 1차 방어전 하나로 무려 6,300만원을 손에 쥐었다. 강남의 괜찮은 아파트 2채를 살 거금이었다.
"이 돈에다가 강원도 출신 실업인들이 구성한 후원 모임인 금강회에서 준 격려금으로 강남 제일생명 뒤의 땅을 사려고 보고 왔어요. 평당 80만원에 200평을 살 수 있었는데 주위 어른이 '땅은 무슨 땅이냐. 운동을 열심히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다'며 꾸짖으시는 거예요. 역시 돈 버는 일은 운이 따라야 하더군요."
그는 오히려 후원회장에게 8,000만원을 맡겼다가 그가 자살하는 바람에 모두 날리고, 은퇴 후 당구장 술집 갈비집 등을 하면서 거듭 사기를 당해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자서전 '빛을 내리소서'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그는 또 한번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운 좋게 복서로 풀려서 그렇지 아니면 나도 교도소에 갈 수 있었기 때문에 항상 재소자들에게 나의 얘기를 해주고 돕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우연히 만나 친해진 대기업 기획실장이 내 얘기를 책으로 쓰겠다는 거예요. 쑥스럽지만 판매는 않고 재소자들에게만 나눠 주는 조건으로 비용을 모두 댔어요. 그런데 엉뚱하게 '하느님의 응답을 받아 소생했다'는 식으로 내용이 변질되고, 나도 모르게 책방에 나가 팔리고 있는 거예요."
그는 "신인왕이 되고서부터 돈이 보이니까 매니저고 뭐고 전부 사기꾼이 되고, 선수를 자기들끼리 팔아 넘기고, 경기를 갖고 장난치는데 환멸을 느껴 싸우다 보니 복싱계에서 미운털이 박혔다"며 선수생활의 단명에 대해서는 "프로는 돈 내고 보러 온 사람을 만족시켜야 한다. '야 이 새끼야 돈 돌려 줘' 하고 소리치는 관중이 진정한 팬인데 복싱이 직업이라면 이들을 기분 좋게 해줄 책임이 있다. 다만 나는 애초에 복싱을 해서는 안 되는 몸이었기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김태식은 강원도 묵호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옥상에서 떨어져 머리를 크게 다친 적이 있었다.
전에는 공부를 꽤 한 것 같은데 이후에 기억력과 성적이 떨어져 공부와 담을 쌓게 되었고 이 머리에 복싱을 하며 계속 충격을 받아 결국 치명타를 입게 된 것이라고.
이미 아로살과의 1차 방어전 때 이상이 나타났고, 타이틀을 빼앗긴 2차 방어전 때 15라운드를 처음 뛴 후 쓰러졌다가 병원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82년 9월 라미레스(멕시코)와의 경기후 의식을 잃어 5시간 동안 뇌수술을 받은 후 생명을 건졌으나 20일간 입원치료를 받았다.
그의 동생 김태규도 복싱을 해 91년 신인왕전에 출전했다. 의지가 강하고 펀치력도 있었다. 하지만 김태식은 경기 중 막내 동생의 눈이 찢어지는 걸 보고는 너무 고통스러워 타월을 던지고 복싱을 그만 두게 했다.
유석근 편집위원 sky@hk.co.kr
■1989년 5월26일/작은 거인 전병관, 올림픽 金 예약
'작은 거인' 전병관은 92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을 3년 전에 예약했다.
미국 플로리다주 포트 로더데일의 89세계 주니어 역도선수권. 8개월 전 88올림픽서 52㎏급 은메달을 획득한 전병관은 곧 체급을 56㎏으로 올렸음에도 용상(155㎏) 합계(275㎏) 두 종목 금메달을 획득하고, 인상(120㎏)에서 동메달을 추가했다.
체중 조절의 부담이 적어 지면서 올림픽 때보다 인상 용상 모두 7.5㎏씩이나 더 든 것.
한국 역도의 세계대회 우승은 국제연맹에 가입한 이래 42년 만에 처음이었다.
더욱이 바르셀로나 대회까지는 3년이란 기간이 남아 당시 19세6개월로 성장 가능성이 무한한 전병관의 올림픽 금메달 획득은 확실해 보였다.
결국 전병관은 91세계선수권대회서도 용상과 종합의 우승을 이루더니 92올림픽서 국민의 기대에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금메달을 따냈다.
평소 연습 때 300㎏을 넘겼지만 무리하지 않고 287.5㎏을 들어 2위인 라이벌 류수빈(중국)에 10㎏ 앞선 것.
그는 96년 애틀랜타 대회에도 나가 3연속 올림픽 출전을 이뤘으나 용상에서 어처구니 없이 실격 당하는 바람에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은퇴, 대표팀 코치로서 후배를 지도하고 있다.
■1987년 5월 24일/박찬영, 홍수환이 뺏긴 타이틀 탈환
세계랭킹 1위에 오르도록 조용히 그늘에 있던 다크호스. 8년 동안 29전을 치르면서도 한국타이틀에도, IBF에도 도전하지 않고 때를 기다려 온 박찬영(24)이 단숨에 WBA 왕좌에 올랐다.
팬들의 기대로 인한 부담없이 홀가분하게 일본으로 날아 간 박찬영은 KO율 70%에 이르는 챔피언 무구루마 다쿠야를 11회 TKO로 제압, 파란을 일으켰다. 74년 12월 홍수환이 남아공 더반에서 아놀드 테일러를 판정으로 꺾고 차지했던 타이틀을 13년 만에 다시 안은 것.
한국 도전자가 해외 원정경기에서 승리한 것은 WBC 슈퍼플라이급 김철호 이후 6년 만이라 감격은 더했다. 박은 펀치력에서 뒤지지만 주먹을 내미는 동작이 큰 상대를 짧은 펀치로 공략하고, 찬스를 잡으면 집요하게 몰아치는 과감한 전술을 펼쳤다. 개런티는 한국 프로복싱 사상 도전자로는 가장 많은 5만달러.
그러나 박찬영은 10월 서울의 1차 방어전에서 윌프레도 바스케스(푸에르토리코)에게 10회 KO패, 130일의 최단명 챔피언이 되었다. 한국선수가 1차 방어전을 못 넘긴 것은 처음.
이후 체급을 올린 박찬영은 89년 12월 WBC 슈퍼밴텀급 챔피언 다니엘 사라고사에게 도전, 홍수환과 똑같은 두 체급의 석권을 시도했다.
하지만 0-2로 판정패. 마지막 12회에 유효타를 맞은데다 심판의 판정도 편파적이었다.
WBC본부가 있는 멕시코 출신인 사라고사는 전년도 이승훈과의 1차 방어전에서도 신통찮은 경기를 하고도 무승부로 타이틀을 방어했는데 이날 영국인 주심은 9회 사라고사가 로프에 기대어 박찬영의 연타를 맞을 때 별 이유없이 경기를 중단시켜 격렬한 항의를 받았다.
■1993년 5월22일/현정화, 세계최초 탁구 그랜드슬램
56년 도쿄대회 출전이후 37년만의 첫 세계선수권대회 여자단식 금메달이었다.
87년 선배 양영자와 여자복식, 89년 유남규와 혼합복식, 91년 북한선수들과 단체전 우승을 한 현정화가 마침내 여자단식마저 석권, 세계 여자탁구 사상 최초로 전종목 우승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부진 이후 위장병과 허리부상으로 시달리던 그는 콩 보리 등을 혼합한 선식만 먹으며 무서운 정신력으로 도전한 끝에 정상에 등극한 것.
스웨덴의 예테보리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승승장구하며 여자단식 8강에 오른 현정화는 이질 러버로 무장한 중국의 천지혜를 예상보다 손 쉽게 3-0으로 일축했다.
대회전부터 대진표를 보고 준결승 상대로 꼽은 선수는 중국의 '마녀' 덩야핑, 그러나 그는 어이없게 3회전에서 침몰, 현정화의 전도를 밝게 해 주었다.
이에 따른 안도감때문인지 현정화는 준결에서 맞선 바데스쿠(루마니아)의 속공에 첫 세트를 뺏기며 고전한 끝에 3-2로 승리했다.
마음을 가다듬은 현은 결승전서 대만의 천징을 3-0으로 일축했다.
이후 대학원 진학, 화장품 광고모델, 자서전 발간 등 외도를 하던 현정화는 94년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던 중 체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94년 2월 은퇴, 현재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아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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