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를 하는데 가장 무서운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태풍이다. 미국 주변에서는 '허리케인'으로 불린다. 나는 미국시각으로 1월 10일 오전 6시를 출항 일시로 잡았다. 미국 서해안 지역에는 그 시기에 태풍이 없고 하와이 지역에도 태풍이 올 확률이 가장 적기 때문이었다. 새벽을 택한 것은 밤이 오기 전에 바다에 익숙해지면 첫날 밤에 무서움이 덜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새벽 5시에 천지신명께 고사를 올리고 친지들의 환송을 받으며 샌디에이고의 아메리카컵 항을 출발했다. 그런데 내해에서는 얌전하게 우리를 대해주던 바다가 넓은 곳에 나가자마자 안면을 바꾸었다. 파도가 높아지고 배는 뒤집어질 듯한 경사를 만들며 전후좌우로 끊임없이 흔들어댔다. 배 안에 있던 것들은 이리저리 흐트러지고 나뒹굴며 소리를 냈다.
배 안 바닥은 난장판이 되었다. 그리고 배의 전신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동행한 신도(4명)들의 얼굴을 보았다. 새파랗게 질린듯했다. 멀리 바다가 큰 너울을 이루며 우리에게 몰려왔다. 그 너울들을 보니 가슴이 울렁거리고 숨이 막히는듯했다. 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공포심을 가라앉혔다.
항해 전에 나는 폭풍 속에서 살아 남는 항해술에 대한 책을 읽었다. 그 가운데 나를 안심시키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20여년을 항해한 저자가 참으로 무서운 바람과 파도를 만난 기간은 오직 3일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폭풍 때문에 포기하고 버려진 대부분의 배들이 뒷날 보면 그대로 물 위에 떠 있다는 것이다. 그 책은 나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그럼에도 강한 바람과 높은 파도 앞에서 공포심을 완전히 지울 수가 없었다.
바람이 시속 15∼20노트 사이로만 불어준다면 항해하기에 아주 좋다. 그러나 원하는 속도로만 불어주지 않는다. 약풍이 강풍으로 될 수도 있고 그 반대도 될 수 있다. 바람이 점점 거세지면 "폭풍으로 변하지 않을까", 바람이 약해지면 "무풍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온다.
바람이 시속 25∼30노트가 넘으면 바람 세기 그 자체 뿐만 아니라 늑대 우는 것과 같은 '위∼위' 소리에 질려버린다. 소리만으로도 공포에 떨게 된다.
한국인 최초로 혼자서 세계일주 항해를 한 강동석씨에게 "시속 몇 노트 이상이면 돛 폭을 줄여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했다. 그는 "배의 크기, 바람 받는 방향, 항해 기술 등에 따라서 다르다"고 대답했다. 자기는 시속 25노트의 바람까지는 소화하면서 항해를 할 수 있었지만 바람을 받아보면 어느 시점에서 돛을 줄여야 하는지 절로 느낌이 온다고 했다.
나는 "만사불여튼튼"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안전제일주의로 돛을 줄이곤 했다. 바람이 20노트 이상이면 무조건 돛을 줄인다는 원칙을 세웠다. 돛을 줄이고 늘이기 위해서는 일 거리가 많다. 바람의 강약 변동이 많을 때는 짧은 기간에도 여러 번 돛을 줄이거나 늘였다.
그러나 강풍만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더 무서운 것은 무풍이었다. 샌디에이고를 떠난 지 닷새 경에 우리는 무풍지대에 갇히게 되었다. 바람은 없는데 파도는 끊임없이 배를 흔들어댔다. 돛대들의 이곳 저곳에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
배와 사람이 다같이 괴롭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기간 묶일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든다. 다행히 우리는 이틀쯤 지나서 바람을 만나 도망칠 수 있었다.
협찬:(주)영조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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