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소니아 간디의 총리 취임 무산으로 인도 국민의회당이 이끄는 새 인도호가 안정으로 방향을 틀지 아니면 더 큰 혼미에 빠질 지 주목된다.간디의 총리 취임 의사와 공산당의 경제 개혁 제동 발언으로 14일 329포인트(6%), 17일 565포인트(11%) 급락한 인도 뭄바이 주식시장 센섹스 지수는 18일 간디의 낙마 가능성이 전해지면서 371포인트(8%) 반등했다.
간디는 경제·외교 정책 변화에 대한 불안과 리더십에 대한 불신을 극복하지 못한 채 총체적 '신뢰의 위기'속에 낙마하고 말았다.
새 총리 후보로는 '붉어진 인도'에 대한 투자자들의 불안과 견제를 잠재우기 위해 1991년 재무장관으로 경제 개혁의 초석을 마련한 만모한 싱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총선 승리를 이끈 간디를 '제물'로 내주며 집권을 위한 정국 돌파를 꾀한 것이다.
검증 안된 통합 리더십
간디의 지도력에 대한 의구심은 안정적 국정 운영에 대한 비관적 전망과 함께 증폭돼 왔다. 가문의 후광 외에는 이렇다 할 정치·국정 경험이 없는 데다 능력을 검증 받을 기회도 거의 없었다. 뉴스위크는 "경험 없는 지도자는 유권자를 의식한 단기적 대중 영합주의에 흔들릴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이탈리아 출신의 외국인이라는 점도 운신의 폭을 극도로 좁혔다. BJP당은 18일 간디가 수상이 되면 의회에 등원하지 않겠다며 공언했다. 서구 자본과 언론의 의구심은 소니아 간디가 '외국인이 인도를 팔아먹는다'는 역풍에 휘말리며 경제 자유화 추진력을 상실하는 게 아니냐는 데 있다.
당장 의회당부터 연정 경험이 거의 없어 19개 세력과의 연정관리 능력에 의문이 제기된다. 적수 없이 수십년간 독점적으로 인도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만모한 싱 등 새 총리 후보군이 하나같이 국정 경험이 많은 원로 정치인이라는 점은 이런 리더십에 대한 우려를 우선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경제 정책 역류 우려
의회당 연합은 실질 집권을 위해 62석을 차지한 4개 공산당과 손을 잡을 수 밖에 없는 '중도 좌파'정권이다. 바라티야자나타당(BJP)의 전 집권 연정의 친 시장 자유화 정책에 제동이 걸릴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커진 이유다.
의회당과 공산당도 때아닌'레드 콤플렉스'를 부채질했다. 공산당은 18일 "신 정부가 외국 투자를 막고 공기업 사유화 정책을 되돌린다는 관측은 근거가 없다"면서도 자유화의 핵심으로 간주되는 공기업 민영화, 정부 보조금 축소 등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안드라 프라데시주의 새 의회당 주정부도 총선 직후 농촌 무료 전기 공급을 선언했다.
서구 투자자들은 '공기업 사유화 폭 축소 + 정부 보조금 증가'→정부 재정 적자 증가 → '법인세와 소득세, 관세 인상'이라는 도식을 그리고 있다. 투자 환경이 급속히 악화할 것이라는 얘기다.
전통적으로 사회주의 색채인 의회당은 이번 총선에서 BJP당의 '분배 정의 실패'에 반발한 농촌·도시 빈민층의 지지에 힘입어 승리한 만큼 최소한 개혁의 속도 조절이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물론 시장 충격은 투자자들의 신경질적이고 조건반사적인 과잉 반응이라는 반박도 많다. 그러나 경제 경험이 없는 간디의 '개혁 다짐'은 시장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외신들이 18일 주가 급등의 원인으로 간디의 퇴진과 만모한 싱의 등장을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외 관계도 미지수
의회당 총선 승리와 함께 급물살을 타던 파키스탄과의 평화 협상이 속도 조절에 들어갈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간디는 외국 태생으로 선택의 폭이 좁아 바지파이 전 총리와 달리 협상 과정에서 양보를 할 여지가 거의 없다는 약점이 지적돼 왔다. 그러나 의회당 세력은 전통적으로 파키스탄 군부와 앙숙이어서 누가 총리가 되든 교감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대미 외교 재조정 가능성도 외국 투자와 맞물려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의회당은 과거 비동맹 회의를 주도하며 미국과 거리를 뒀고 최근에는 인도의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고 미군의 이라크인 학대 등을 격하게 비난했다.
직면한 시험대
장수를 갈아도 의회당이 직면한 과제는 여전하다. 서구 언론의 해법은 '보다 강도 높은 개혁'일색이다. 눈 앞의 '개혁통(痛)'을 이겨내야 인도 경제가 한 단계 올라설 수 있다는 것이다.
새 정권의 '색깔'을 가늠해볼 수 있는 몇 가지 경제정책을 제시하며 사실상 양자 택일을 압박하고 있다. 정부 보조금 축소, 국영은행과 인도항공 등 공기업 민영화, 석유 산업 규제 완화 등이 대표적 리트머스 시험지다. BJP당도 실패한 노동시장 유연화 노동법을 통과시키라는 요구까지 나온다.
총리 지명부터 내우외환에 시달린 의회당이 공약 대로 '성장과 분배의 균형', '인간의 얼굴을 한 개혁'을 추진해 나갈지, 아니면 농촌·도시 빈민의 표심과 달리 경제개혁 강도를 높여 나갈지 그 선택의 정치·경제적 파장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네루-간디 가문 '인도의 케네디家'
18일 소니아 간디의 총리 취임이 끝내 무산되면서 인도의 케네디가(家)로 불리던 네루-간디 가문의 영고성쇠가 새삼 관심을 받고 있다. 네루-간디 가문은 인도 최대의 정치 귀족이자 케네디가처럼 비운의 주인공들도 많다. 그러나 국내 정치적 영향력은 훨씬 앞선다. 네루-간디 가문은 지금까지 3명의 총리를 배출, 1947년 독립 이후 37년 간 인도를 통치했다.
출발은 1929년 영국 식민지 치하에서 인도 국민의회당 대표로 독립운동을 한 모티알 네루(1861∼1931). 아들 자와할랄 네루가 47년부터 64년까지 초대 총리를 지내며 인도 정계에서의 영향력을 확고히 다졌다.
네루의 외동딸인 인디라 네루가 42년 페로즈 간디와 결혼하면서 집안의 성은 간디로 바뀐다. 페로즈는 인디라와의 결혼을 위해 마하트마 간디의 양자가 됐을 뿐 혈연 관계는 없다고 한다. 네루-간디 비극의 그림자가 깃든 것은 바로 인디라 때부터다. 두 차례 총리를 지낸 인디라는 84년 시크교도인 경호원에 의해 암살당했다. 인디라의 차남으로 유력한 후계자였던 차남 산자이는 비행기 사고로 요절했다.
1965년 영국 유학 시절 라지브를 만난 소니아는 이런 이유로 라지브의 정계 진출을 결사 반대했지만, 라지브는 인디라 암살 뒤 총리가 됐다 91년 역시 암살됐다. 이후 소니아 정치권과 거리를 뒀지만 98년 몰락 직전의 의회당을 구해달라는 호소에 정치에 뛰어들었고, 6년 만에 의회당을 재집권 시켰다. 인도의 한 소식통은 "간디가 총리직 사퇴를 고심한 것은 신변 안전을 걱정한 아들 라훌 의원 등 가족의 만류 탓도 있다"고 전했다.
/진성훈기자 bluej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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