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자동차 업계의 극심한 경쟁을 이겨내고 살아남을 업체는 3∼5개에 불과할 것이다." 지난 10여년동안 자동차 산업은 이러한 명제가 '절대진리'처럼 받아들여졌다. 1990년대부터 세계적 컨설팅 업체 보스턴컨설팅그룹과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 및 미시건대 자동차연구소 등은 미국의 GM과 포드, 일본의 도요타, 독일의 폴크스바겐 등 풍부한 현금, 활발한 생산활동, 범세계적인 영업망, 높은 인지도를 가진 초대형 완성차 업체 3∼5곳이 세계 자동차 시장의 인수·합병(M&A)을 주도하며 마지막 승자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세계 자동차 산업의 지도는 이러한 M&A 및 전략적 제휴의 결과, 끊임없이 다시 그려지고 있다. GM은 스웨덴의 사브, 독일의 오펠, 이탈리아의 피아트, 한국의 대우 등을 인수함으로써 현재 세계 최대 자동차 기업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포드도 볼보, 랜드로버, 마쓰다 등을 합병했다. 특히 98년 다임러벤츠는 당시 생산 대수가 2배나 많았던 크라이슬러를 전격 인수,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PWC에 따르면 2002년 자동차 산업의 M&A는 건수 기준으로 전년대비 35% 증가한 621건에 달했다. 금액 기준으로 보면 전년대비 85% 늘어난 352억 달러를 기록했다.
자동차 산업이 고질적인 공급 과잉에 시달리고 있고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어 차세대 자동차를 개발하는 데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감안하면 나머지 업체는 결국 시장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란 분석이다.
이들 컨설팅그룹은 또 자동차 생산의 경우 400만대가 적정 규모이고 세계 자동차 산업은 2,000만대 과잉 생산이 존재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지적은 전세계적 네트워크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글로벌 조달 및 생산 시스템을 가속화해 시장 지배력을 높이려는 선진 기업들의 이해와도 부합한다.
그러나 이같은 명제가 자동차 산업의 미래에도 적용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자동차 전문가들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오히려 이러한 주장은 자동차 산업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칫 잘못된 전략의 채택을 가져올 수 있다는 분석이다.
'천상의 결혼'으로 평가받던 다임러벤츠와 크라이슬러의 합병 결과는 이러한 반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5년이 지난 지금 업계에선 양사의 합병을 '신이 기업을 발명한 이후 최악의 M&A'라고 혹평하고 있다. 고급 승용차의 대명사인 독일 다임러벤츠와 경트럭 부문의 강자인 미국 크라이슬러의 합병은 390억 달러라는 제조업 최대 M&A 금액 뿐 아니라 가격, 시장, 차종에서 중복이 거의 없는 완벽한 합병이란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메르세데스벤츠라는 유럽 명품을 탄생시킨 독일의 기술과 '아이아코카 신화'로 대변되는 크라이슬러의 결합은 시너지 효과보다는 크라이슬러 경영진의 대거 이탈, 재무 구조 악화, 시장 점유율 감소라는 악재만을 생산했다.
크라이슬러 부문의 판매실적은 합병 이후 계속 줄어 99년 322만대에서 지난해엔 263만대로 감소했고 이 때문에 영업이익도 적자로 전환됐다.
다임러크라이슬러는 이와함께 37%의 지분을 보유한 미쓰비시자동차마저 존망의 기로에 서 있어 이중고를 겪고 있다.
2000년 미쓰비시에 2,000억엔 이상을 지분 투자한 다임러크라이슬러는 이후 미쓰비시의 경영악화가 계속되자 최근 대규모 현금지원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사회에서 제동이 걸리는 바람에 위르겐 슈렘프 회장의 지위마저 위협받고 있을 정도이다.
다임러크라이슬러처럼 M&A에 적극적이었던 GM도 판매량이 2000년 858만대에서 지난해 809만대로 하락추세이고, 포드도 같은 기간 742만대에서 672만대로 떨어졌다. 반면 M&A에 소극적이었던 도요타와 독자생존의 길을 걷고 있는 혼다는 꾸준히 세계 시장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다.
도요타는 지난해 전세계에서 678만대의 자동차를 판매, 포드를 제치고 세계 2위의 자동차 회사로 부상했다. BMW도 풀 라인업을 갖춘 글로벌 양산업체로서의 입지는 약하지만 고급차 및 레저용차량 부문의 강점을 기반으로 품질향상과 고급화를 통해 매출과 순익을 키워가고 있다.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 박홍재 선임 연구위원은 "불확실성이 높은 현대 경영환경에서 단순히 외형적 확대만 추구하다 보면 오히려 해당기업을 옥죄는 덫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며 "무리한 확장보다는 조직의 통합성과 유연성을 통해 단위 시간당 생산량을 높이고 시장의 변화와 고객의 요구에 빠르게 대응하는 '속도의 경제'를 추구하는 전략이 유효할 것"이라고 밝혔다.
2010년 연산 500만대를 생산 체제를 통해 '글로벌 톱5'로 부상하겠다는 야심찬 전략을 추진하고 있는 한국 자동차 산업의 대표 선수인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이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박일근기자 ikpark@hk.co.kr
■준 완성품인 몇개의 "모듈"로 차조립 모듈화 따라 부품업체도 M&A 붐
'10개도 안 되는 모듈 조립만으로 자동차를 완성한다?'
세계 자동차 부품 산업에 '모듈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모듈이란 부품이나 시스템의 집합체로 계기판 모듈이나 도어 모듈 등을 생각하면 쉽다. 이러한 모듈은 통상 1차 협력업체(벤더)가 조립해 완성차 업체에 납품하게 된다.
따라서 완성차 업체는 예전처럼 2만∼3만개의 부품을 일일이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준완성품 형태의 모듈을 공급 받아 이를 하나의 단위로 차량에 장착하게 된다. 일종의 아웃소싱(외부조달)인 셈이다. 다임러크라이슬러의 '스마트' 모델은 단 7개의 모듈로 조립되고 있을 정도이다.
모듈혁명의 이유는 완성차 업체가 모듈화를 통해 관리비용과 제조비용을 크게 절감, 경쟁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벤더 수가 줄어드는 만큼 완성차 업체의 관리 비용은 줄어든다.
이러한 모듈화는 1940년대 항공기 산업에서 시작된 것을 자동차 업계에선 80년대 피아트가 처음 도입했다. 최근에는 다임러크라이슬러가 모듈화전략을 주도하고 있다. GM과 포드도 부품생산 업체인 델파이와 비스테온을 각각 1999년과 2000년에 분사시킨 뒤 외주 비율을 높이고 있다. 델파이와 비스테온은 나아가 다른 완성차 업체에 대한 납품 비율을 점점 높여가고 있다.
이러한 모듈화로 세계 자동차 산업에서는 완성차 업계의 인수·합병(M&A)에 이어 다시 부품업체간의 M&A 붐이 일고 있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부품업체의 대형화로 인해 2008년에는 1차 벤더 수가 150∼175개, 2차 벤더는 2,000개 정도로 집약될 것으로 보인다. 컨설팅업체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는 궁극적으로는 1차 벤더가 30여개, 2차 벤더는 800여개로 각각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최근 모듈화가 진전되며 부품업체가 먼저 새로운 차세대 모듈을 설계한 뒤 완성차 업체에 이에 맞는 신차 개발을 주문하는 사례마저 나타나고 있다. 갑과 을의 위치가 바뀌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아직 완성차 업체가 먼저 신차를 설계한 뒤 이를 부품업체가 맞추도록 요구하는 단계이다. 모듈화율도 일부 선진 업체들이 90% 이상인 반면 우린 아직 30% 내외에 그치고 있다. 이 때문에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모듈화에 대한 투자와 지원이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 관계자는 "현재 우리나라의 자동차 부품업체수는 대기업 69개사를 포함 880여개이나 이중 세계 100대 부품기업은 현대모비스 단 한 곳밖에 없다"며 "핵심 부품 및 시스템 분야의 기술자립을 확보하는 한편 우리가 비교우위를 가진 부품 및 모듈의 전략적 투자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박일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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