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이 먼저냐, 개혁(혹은 분배)이 먼저냐를 둘러싼 최근의 논쟁과 관련해 기업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뭘까. 성장우선론? 물론 아니다. 그렇다면 개혁우선주의? 그것도 아니다. 기업인들을 가장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은 '이도 저도 아닌 채 시간만 끄는 불확실성'이다.
기업은 생명체와 같다. 최적 여건이 아니고 설령 악조건이라도, 예측가능한 환경이라면 나름대로 적응력을 발휘하게 된다. 성장론이든, 개혁론이든, 혹은 양자를 조화시킨 제3의 길이든, 정부의 원칙과 행동이 분명하다면 기업들은 대응방법을 찾게 된다. 한 기업인은 "솔직히 지난 1년을 돌이켜보면 현 정부의 정체성이 뭔지 모르겠다. 친기업적인 것 같기도 하고, 친노조적인 듯 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반드시 중립적인 것도 아니고…. 이젠 명확한 원칙과 일관된 행동을 보여줘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러나 성장과 개혁은 양자택일의 대상이 아니다. 새 출발하는 참여정부의 경제 패러다임은 어차피 성장과 개혁을 두 축으로 할 수 밖에 없다. 성장론을 대표하는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구시대적 개발주의자가 아니고 개혁론의 깃발을 든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이 사회주의자가 아닌 이상, 양자 모두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는 이상, 성장과 개혁은 함께 굴러가는 수레바퀴인 것이다.
현 시점에서 한국경제의 최대과제는 첫째도 투자, 둘째도 투자다. 청년실업, 소득부진, 내수위축, 산업공동화 등 모든 문제가 투자부진에서 파생된다. 투자활성화는 경기회복과 성장잠재력 확충을 도모할 수 있는 유일한 장·단기 동시대책이다. 무역연구소 현오석 소장은 "핵심은 성장동력이 마모된다는데 있다. 이에 비하면 고유가 중국변수 미국금리인상 같은 대외적 경기순환의 문제는 오히려 부차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참여정부 2기의 성장과 개혁 패러다임도 투자활성화의 관점에서 정립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전문가들은 참여정부의 경제운용 원칙을 '성장에 도움이 되는 개혁'으로 주문하고 있다. 선과 악이 아닌, 경제효율 제고의 관점에서 개혁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대 이 근 교수(경제학)는 "개혁은 필요하지만 결코 성장과 투자를 저해하는 개혁이어서는 안된다. 예컨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면 그만큼 기업에게 해고권한을 보장해야 하며 총액출자 같은 내국인 역차별 규제도 재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분배문제 역시 정규직 보호나 중소기업 보호 같은 시장에 대한 인위적 '물막이 정책'이 오히려 자원배분을 왜곡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투자가 제 1과제라면 현실적으로 기업을 등질 수는 없다. 누가 뭐래도 투자주체는 기업이고, 기업의 투자결정은 뇌물기업인 불구속이나 대통령 주재 대기업 총수 간담회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삼성경제연구소 정문건 전무는 "기업투자를 이끌어 내려면 투자할 만한 환경부터 조성해야 한다. 곳곳에 깔려있는 반기업 정서와 반기업적 규제조치부터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경제계에선 아직도 참여정부의 기업관에 신뢰감을 갖지 못하고 있다. 물론 기업의 반시장적 행태까지 끌어안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엄정성은 노(勞)와 사(使), 민간과 공공 모두에 동등하고 일관되게 적용돼야 한다. 서강대 남성일 교수(경제학)는 "대통령이 담화문에서 이해집단의 목소리에 매몰되지 않겠다고 밝힌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 이해집단이 재계만은 아니며 노조, 시민단체, 공공부문까지도 포함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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