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 맞선을 32번 봤다. 그리고 두 살 아래인 아내와 마지막 선을 봤다. 맞선 장소에서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며 꼭 결혼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고 2개월간의 연애를 거쳐 결혼하게 되었다. 하지만 첫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고통을 겪었다. 아이가 태어난 지 7일 만에 인큐베이터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충격이었다. 부모로서 배 아파 낳은 자식 얼굴도 보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컸다. 벼랑 아래 암흑 속에 던져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다시 아이를 낳기 위해 노력했지만 번번이 유산을 했다. 우린 상처를 가슴에 안고 경주로 여행을 떠났다. 아내와 함께 찾은 바닷가의 어느 쓸쓸한 민박집…. 나는 흐느끼는 아내의 눈물을 쓸어 내리면서 밤을 지새웠다. 이토록 아픈 인생이 또 있을까 싶었다.
이대로 주저 앉을 수는 없었다. 죽음을 15년간 연장해 달라고 기도했다던 유대의 히스기야 왕처럼 도발적인 기도를 올렸다. 아내의 배를 손으로 감싸며 우리 부부는 매일 밤 눈물로 기도했다. 신에게 생떼를 썼다. 당신이 살아 계시면 징표를 보여달라고 했다.
그로부터 1년 뒤 우리 부부의 소원은 이뤄졌다. 그 아이가 지금의 큰 딸이다. 첫째에 대한 사랑은 남다를 수밖에 없고 그만큼 근심도 끊이지 않았다.
딸이 태어난 지 7년 후 어느 날 나는 태몽을 꾸었다. 그리고 아내는 둘째 아이를 임신했다. 아내는 아이가 혹시 유산되지 않을까 고민했다. 나는 아내를 설득했다. 이 아이는 분명 죽은 첫 아이가 보낸 영혼이라고 믿고 싶었다. 둘째 딸은 이제 32개월이 된다. 둘째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김치, 된장, 콩을 잘 먹는다. 큰 애가 잘 먹지 않는 것을 모두 다 잘 먹으니 엄마는 무척이나 좋아한다.
첫째는 혼자였을 때 사랑을 독차지하다가 둘째가 태어난 이후 구박받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큰 아이의 등을 살짝 두드렸다. "너는 네 동생보다 10배나 많은 사랑을 받았단다. 서럽게 생각하지 마라, 이젠 네 사랑을 동생에게 조금 나눠 주는 것뿐이다. 아버지 어머니가 가끔 나무라더라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라." 우리 부부에게 두 아이는 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이다.
/황선주·경북기계공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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