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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가진 자를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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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가진 자를 위한 변명

입력
2004.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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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전쯤 사석에서 만난 노신사는 대뜸 한숨부터 내쉬었다. 건실한 음반 관련 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그이지만, 계속되는 하소연은 성공한 60대 초반 신사의 자신감있는 표정과는 영 달랐다. 그는 기업을 운영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는 건 그래도 참을 수 있지만, 친구들이 이땅을 자꾸 떠나 외로움과 허탈감을 견뎌내기가 힘겹다고 했다."작년말부터 부자 소릴 듣던 친구 3∼4명이 (한국을)떴어요. 대한민국이 무서워졌기 때문이죠. 나라라는 게 사람들을 안아주고 편안해야 하는데, 도통 그렇지가 않아요. 케케묵은 이념싸움을 하지 않나, 부유세 얘기가 나오질 않나. 근로자 경영참여는 또 무슨 소립니까. 다 무시하고 다 똑같이 살자는 얘기입니까. 도무지 불안해서 살 수가 없어요."

그의 쓴소리는 계속된다. "친구놈들 밴쿠버, 호주, LA로 갔는데, LA는 한국에서 오는 사람들 때문에 얼마전에는 집값이 올랐다고 해요. 한 친구는 골프장 지으려고 돈까지 다 마련해놓고 그만뒀어요.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다는 거죠. 요즘은 가끔 즐기던 술도 안 마셔요. 불안한데 흥청망청할 수가 있나요." 그에게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돈은 원래 시끄럽고 불확실한 걸 싫어하죠"라는 짧막한 응답이 되돌아왔다.

기업이 투자를 꺼리고 사람들이 돈을 쓰지 않는다는 얘기는 더 이상 '뉴스'가 아니지만, 그의 푸념은 가진 자의 한가한 배부른 소리로만 들리지는 않았다. 가진 자들의 정통성, 도덕성과는 별개로 그들의 움츠림과 도피는 모두에게 해로운 위험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떠날까. 여러 사유가 있겠지만, 로마제국이 쇄락의 길을 걷기 시작할 무렵 로마시민들이 겪었던 시대와의 불화와 불안을 참고로 할 만 하다. '카라칼라 대목욕탕'으로 유명한 카라칼라황제는 3세기초 평등이라는 이상론적인 명분을 내세워 광대한 속주(식민지) 주민들에게도 로마시민권을 무상으로 주었다. 당시 로마시민권은 현대의 미국시민권 보다 훨씬 귀한 특권이었던 만큼 속주민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이후 로마는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빠져든다. 속주민들이 병영에서 청춘을 바쳐야 얻을 수 있었던 로마시민권이라는 '취득권'이 업적에 관계없이 자동적으로 받을 수 있는 '기득권'으로 바뀐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종래의 로마시민권자들은 허탈감에 빠져 자부심을 잃고 뒷짐을 지기 시작했고, '공짜로 얻은 권리'는 속주민들의 경쟁심 마저 잃게 했다.

더 큰 폐해는 사회의 경직화로 나타났다. 시오노 나나미는 12번째 '로마인 이야기'에서 "노력의 결과물이었던 시민권이 기득권이 된 후 계층간 유동성이 없어지고, 로마제국은 동맥경화에 걸렸다"고 적었다.

로마시민권자들과 한국의 가진 자들은 질적인 면에서 같지는 않다. 로마시민권자들은 그들의 의무에 비교적 충실했고 존경을 받았다. 한국의 가진 자들은 일부는 그렇고 다른 일부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그들이 느끼는 시대와의 불화를 마냥 "가진 자의 기득권 지키기'라고 내치는 것은 이념적인 낭만주의다. 가진 자로서의 '의무'를 다했는 지 여부와는 별개로 매우 중요한 한 축이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가 노무현 대통령이 복귀 이후 새삼 강조한 개혁을 '나쁜 것'이라고 여기지만은 않는다. 대신 집도의의 수준에 대한 의구심은 매우 크다. 수술이 잘못돼서 앞뒤와 위아래가 뒤바뀔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감지된다. 탄핵소추 기각 이후 중차대한 숙제 중 하나는 이들을 붙잡아둘 수 있는 경륜있고 실력있는 집도의를 '합리' '합법'이라는 명찰이 붙은 수술대 앞에 세우는 일이다.

/김동영 사회2부장/dy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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