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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원작 '일리아드'를 충실히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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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원작 '일리아드'를 충실히 재현

입력
2004.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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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라,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스의 분노를 노래하라."호머의 '일리아드' 첫 구절이다. 이 말이야말로 영화 전체 이야기의 핵심이다. 2억 달러를 들인 볼프강 페터슨 감독의 대작 '트로이'(Troy)는 '일리아드'를 충실하면서도 극적으로 요약한다. 그리스 연합군의 최정예 전사인 아킬레스(브래드 피트)의 분노와 그의 맞수인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에릭 바나)의 죽음에 초점을 맞춰 서사시의 성격을 극대화했다.

아킬레스의 분노는 무엇인가. 전리품 상실과 사촌의 죽음이다. 9년 동안 계속된 전쟁에서 전리품이란 사소하기 짝이 없고, 목숨을 잃은 자가 한 둘이 아닌데 유독 아킬레스만 분노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그리스 연합군이 자랑하는 최강의 전사 아킬레스의 웃음과 울음에 전쟁의 향방이 바뀐다면 말이 달라진다. 5만 대군도 아킬레스가 없으면 허수아비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영화 '트로이'는 아킬레스의 싸움 솜씨를 보여주며 문을 연다. 호머가 '빨리 달리는 자'라는 별명을 붙인 대로, 아킬레스는 비호 같이 날아서 골리앗 같은 적의 장수를 거꾸러뜨린다. 브래드 피트의 건장한 몸매를 이토록 십분 활용한 영화는 처음일 것이다. 트로이 전쟁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올란도 블룸)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다이앤 크루거)를 납치하면서 발발했지만, 그건 실마리에 불과했다. 스파르타의 군주 아가멤논은 이를 구실로 동맹군을 규합해 트로이 정복에 나선다.

브래드 피트의 몸이 첫 번째 스펙터클이라면, 난공불락의 요새인 트로이가 어떻게 무너지는가가 두 번째 스펙터클이다. 그리스 연합군은 5만 대군을 앞세워 파상공세에 나서고 트로이는 기습적 화공으로 맞선다. '특전 U보트'(1981년)로 잠수함이라는 폐쇄 공간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투쟁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던 페터슨 감독은 그 영화 이후 큰 기대를 모았고 '아웃 브레이크' '퍼펙트 스톰' 등 전형적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만들어 왔다.

'트로이'의 압권은 싸움 이후의 장면들이다. 아킬레스가 사촌을 장례 지내는 장면, 트로이의 명장 헥토르와 아킬레스의 대결, 아킬레스가 헥토르의 시체를 끌고 트로이 군 앞에서 시위하는 장면, 그리고 프리암(피터 오툴)이 아들 헥토르를 잃은 뒤 아킬레스를 찾아가 아들의 시체를 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이 명배우들의 연기 속에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페터슨 감독의 연출은 남자들 사이의 우정에 대한 통찰력에서 빛을 발한다. 그것은 바로 호머가 그린 그리스 영웅들의 정서와도 맥이 닿는다. 친구에 대한 무조건적인 우정과 적에 대한 맹렬한 분노, 그리고 죽은 자에 대한 예우를 빼고 나면 그들에겐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감독이 자신의 전공에서 벗어나 아킬레스와 그의 전리품인 트로이의 여사제(로즈 번) 사이의 사랑, 파리스와 헬레네 사이의 불륜을 미화할 때 영화는 긴장을 잃는다.

에릭 바나와 브래드 피트의 위엄에 비해 아가멤논 역의 브라이언 콕스 등 다른 훌륭한 배우들의 연기가 빛이 나지 않는 것도 아쉬움의 하나. 그리스의 맹주이자 아킬레스의 라이벌인 아가멤논이 기껏해야 '탐욕스런 돼지' 정도라면, 아킬레스의 위용도 그만큼 작아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21일 개봉, 15세 관람가.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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