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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111>5월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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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111>5월 광주

입력
2004.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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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5월로부터 스물네 해가 지났다. 1987년 6월항쟁 이전까지 대학 교정이나 자취방 안에서만 전수되는 외경(外經)이었던 1980년 5월 광주는 제6공화국이 들어선 뒤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밋밋한 이름으로 '오피셜 스토리'에 편입됐다. 그러나 그것의 실질적 복권이 이뤄진 것은 아니다. 5월 광주를 오로지 '지역'이라는 코드 안에 가두려는 집요한 노력은 꽤 성공적이었다. 실제로 그것은 우리 사회 정치적 지역주의의 모터이기도 하다. 학살자의 정치적 상속자들에게 여전히 굳건한 지지를 보내는 지역과 그 해 5월의 학살이 저질러진 지역 사이에 아무런 긴장이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광주민주화운동 또는 광주사태는 두 얼굴을 지녔다. 그것은 시민이 주체가 된 '광주항쟁'이자, 신군부가 주체가 된 '광주학살'이었다. 그 학살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가? 항쟁이 끝난 뒤 연행된 시민들은 차라리 현장에서 죽지 못한 것을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가 펴낸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1990)에 따르면, 살아서 끌려온 시민들에게 그 해 5월은 '지상의 지옥'이었다. 그들이 당한 고문의 양태는 인간의 잔혹함이 어디에까지 이를 수 있는가를 섬뜩하게 증언한다. 차마 이 자리에 옮길 수 없는 그 참혹한 고문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파멸했다.

대통령으로서 김대중의 가장 큰 과오는 1998년 12월 당선 직후에 이뤄졌다. '실질적' 대통령이었던 그는 '형식적'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을 통해 감옥에 있던 전두환을 풀어주었다. '국민대화합'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누가 그에게 학살자를 사면할 권리를 주었는가? 그리고 학살자가 자유를 얻음으로써 '국민대화합'은 이뤄졌는가? 설령 '국민대화합'이 이뤄졌다 해도, 그것은 노예의 도덕에 기초한 비루한 화합이었을 것이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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