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로된 미군의 이라크 포로 학대 사진들을 보는 순간, 오랫동안 잊고있던 그가 문득 생각났다. 윤석양(尹錫洋·38) 이병. 14년 전 보안사의 민간인 불법 사찰 사실들을 폭로함으로써 우리 사회 민주화 과정에 또 하나의 계기를 만들었던 젊은이다. 사람들의 기억이란 허망하고 냉정한 법. 그토록 열화 같던 관심도, 찬사도, 혹은 분노조차도 현실과 매개되지 않는 한 다시 떠올려지는 법은 없다. 그러므로 기억은 언제나 현재형이다.어렵게 연락이 닿았으나 그는 뜻밖에 선뜻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최근에 마무리 지었다는 육필원고를 보내왔다. 90년 사건 이후의 세월을 담담하게 정리한 수기였다. 웬만한 단행본 분량을 넘는 글은 그 동안의 고통스러운 생활의 기록이라기 보다는 자아(自我)를 찾아가는 처절한 실존적 고뇌의 기록에 가까웠다. 그걸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시대상황 속에서 상처 입은 한 젊은이가 어떻게 스스로를 치유해 왔는지를 더 들어보기 위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저를 '양심선언을 한 용기있는 사람'으로만 봅니다. 그러나 저는 '프락치'이기도 했습니다. 그 두 가지 면이 다 저의 모습이지요." 십 수년 동안 윤석양씨가 홀로 고통스럽게 싸워온 것은 바로 이 같은 정체성의 혼란이었다.
(당시의 일을 간단하게 되짚어보자. 윤씨는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어과 85학번이다. 학생운동으로 4학년 2학기 때 제적된 뒤 1990년 5월 자진입대, 전방에 배치됐으나 운동권 전력이 빌미가 돼 그 해 7월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된다. 여기서 그는 수사관들의 회유와 협박 등에 의해 운동권 수사에 협조하게 된다. 그러다 입대 전 몸 담았던 혁노맹 사건이 표면화, '2중 스파이'로 의심받게 되자 9월23일 탈영한다. 그리고는 10월4일 기자회견을 통해 탈출 시 갖고 나온 민간인 사찰기록을 공개했다. 김영삼 민자당 대표, 김대중 평민당 총재, 노무현 민주당 의원과 김수환 추기경 등 1,600여명에 대한 불법 사찰실태가 폭로되자 정국은 엄청난 회오리에 휩싸였다. 결국 국방장관과 보안사령관이 해임되고 보안사는 기무사로 개편됐다. 윤씨는 2년 만인 92년 9월 체포돼 군사법원에서 2년형을 선고받아 94년 11월 만기출소했다)
"많은 이들이 '양심의 승리'라며 저를 격려했습니다. 감옥에서 만난 황석영(黃晳英) 선생님도 손 잡고 '고생이 많았다'고 과분한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수배 중에 만난 농민 활동가는 제게 '변절자'라고 했습니다." 출소 후 복학 서류를 준비하러 나간 학교에는 '자랑스러운 윤석양 선배 환영'이란 현수막이 나붙었다. 그 즈음 만난 선배는 입에 담지 못할 극언을 그에게 퍼부어댔다. "어느 것이 진짜 내 모습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회색이 돼버린 물감은 원래의 검은 색과 흰 색으로 분리할 수 없지요. 저도 그렇게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상태가 돼버렸던 겁니다."
유난히 감성이 섬세한 윤씨는 이런 갈등을 감당해낼 수가 없었다. 보안사 수사관들 앞에서 모든 것을 불었던 기억이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고, 그러다 보면 양심선언이란 것도 그런 잘못에 대한 순간적인 보상심리의 발동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양심선언조차도 괴로운 기억으로 바뀌었다. "결국은 스스로가 싫어 견딜 수 없는 자기학대로 빠지더라구요. 자기학대는 자기반성과는 완전히 다르지요. 도저히 절제되지 않을 뿐더러, 전염병처럼 번져 남에 대한 미움으로 고스란히 전이됩니다. 제게 남은 건 세상 모든 이들에 대한 지독한 미움 뿐이었어요."
윤씨의 갈등과 자기학대는 수배를 피해 전국을 옮겨 다니며 은신생활을 할 때부터 시작됐다. 여러 계기들도 있었다. "신문에 공안사건 재판 기사가 났습니다. 한 운동가가 검사측 증인으로 나와 이전의 동지들을 논박하는 내용의. 서빙고에서의 제 모습과 하나 다를 게 없었지요." 늘 투철한 신념을 자랑하며 윤씨의 나약함을 부끄럽게 만들었던 선배가 사실은 이미 수사기관에서의 적나라한 토설로 자신이 몸 담았던 운동권 조직을 와해시킨 인물이었음을 알게 됐을 때도 그랬다.
체포 뒤의 교도소 생활은 미움을 더욱 증폭시켰다. 고참 수감자들의 말 못할 횡포와 뻔뻔스러움, 신참들의 공포와 비굴함 등이 그를 못 견디게 만들었다. "감방 서열이란 게 따지고 보면 죄를 먼저 지은 순서지요.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고참의 등에 증오의 눈길을 보내던 신참도 똑같아집니다. 그럴 위치가 되면 남을 괴롭히는 재미와 쾌감을 포기하지 못하는 거지요. 인간 모두의 본성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의 내면에 허무와 냉소만이 끝 모르는 뿌리를 뻗어갔다.
출소 후 복귀한 현실 역시 참담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친어머니가 지병으로 돌아가신 이듬해부터 가난한 살림을 떠맡았던 새어머니가 집을 나갔다. 누나들의 냉대 속에서 봉투 붙이고 구슬 꿰매며 눈물로 살아오던 새어머니는 그가 출소 후 두달 동안 울고 웃고 소리지르는 이상증세를 보이다 홀연히 가족들과의 인연을 끊었다. 의지할 곳이 없어진 윤씨는 누이의 보증으로 은행빚을 얻어 월세방을 마련하고는 복학했다. 돈이 없어 매일 점심은 수돗가의 물로 때웠다.
학교의 분위기도 참기 어려웠다. 정신은 없고 껍데기만 남은 이념, 무차별적이고도 가혹한 비난이 운동성을 평가하는 듯한 분위기…. 과거의 운동권 경력을 무슨 훈장처럼 자랑하면서도 국회의원 등의 명망가로 변신한 동료들에 대한 열등감과 질투심으로 비틀린 선배, 동료들도 그의 좌절감을 깊게 했다. 그런 이들에게 '변절자' 윤씨는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전가하는 가학(加虐) 대상이었다. 스무 살 때부터 정신병을 앓아온 형이 병원을 나와 한동안 그의 좁은 방에 얹혀 있다가 2년 만에 강원도 산골의 어느 복지시설로 떠났다. 그 힘든 세월 동안 여자친구만이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곁을 지켜주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윤씨에게도 극단적인 피해의식에 따른 정신병적 증세가 나타났다. 여자친구에게 소리 질렀다. "왜 나한테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거지? 분명 무슨 음모가 있어. 누가 나를 이런 상황으로 떠밀어내고 있는지, 너를 조종하는 게 누군지.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해 봐…!" 그 즈음 그의 일기는 온통 삶에 대한 절망과 죽음에 대한 갈망으로 채워졌다.
형을 산으로 떠나 보낸 96년 가을 여자친구와 결혼을 하고 나서야 주변 현실은 조금씩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맹렬한 지적 욕구가 솟구쳤다. 한동안 미학을 공부하다 사회주의 숙청사를 연구하고, 임화(林和)를 공부하다 생태학과 과학철학도 했으며, 영화, 컴퓨터, 경영학, 게임과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닥치는대로 공부했다. "확신에 차 공부하다 몇 달 만에 싫증 내고, 또 다른 확신을 좇다 또 그만두고…." 무모한 몇 년이었지만 헛된 시간은 아니었다. "공부를 통해 새로운 뭔가를 얻지는 못했지만 과거의 어떤 것을 버릴 수는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경직된 이념과 사고의 틀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미움, 짜증 등도 세월과 함께 서서히 잦아들었다. 간혹 발작적으로 터져 나오는 감정의 폭발까지는 어쩌지 못했어도.
운동권 선배 등이 주선해준 회사들을 다니며 생활도 차츰 안정돼 갔다. (그는 지금 서울 강남의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에서 팀장을 맡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조금씩 세상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다. 고속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장엄한 일몰, 늦은 밤 도심 안개 속에 떠오르는 희뿌연 가로등빛,…. 전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이런 일상의 풍경들조차 가슴 벅찬 감동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마침내 삶을 치유하는 것은 있는 그 자체로서의 아름다움이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던 자기 분열적 자아조차도 삶의 원초적 존재방식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그렇게 스스로에 대한 미움에서 벗어나자 그에게 상처를 주었던 다른 이들도, 부조리한 세상까지도 용서할 수 있었다. 마음이 편해졌다. "당연한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지요." 그는 그렇게 길고 긴 고통의 터널을 벗어났다. 바로 얼마 전이었다.
●윤석양씨는
수기에 빠삐용의 꿈을 적었다. '빠삐용은 꿈 속에서 사막을 걸었다. 멀리서 판관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빠삐용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인생을 낭비한 죄를 지었다면서. 나도 내 인생을 낭비한 걸까?'
그는 보수와 진보 따위의 편협한 이념적 시각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객관적 관점에서 박정희, 김대중 등 현대사 인물들에 대한 평전을 쓸 계획이라고 했다. 그토록 힘겨웠던 자기 확인과정과 공부를 통해 얻은 인식이다. 세상에 절대선과 절대악이란 없으며, 다만 더 옳은 길과 덜 옳은 길이 있을 뿐이라는.
그러니 그는 삶을 낭비하지 않았다.
이준희/편집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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