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남자가 응급실로 끌려왔다. 그는 내원 이틀 전 남북 분단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임진각에서 북측으로 넘어가려다 제지돼 경찰로 넘겨졌다. 그는 3주 전부터 이유없이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고, 사업구상이 마구 떠올라 그의 수첩은 며칠 만에 깨알 같은 계획으로 가득 찼다.또 하루에 수십 통씩 여러 곳에 전화를 해서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사업구상을 설명하고 비싼 술집에 가서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도우미에게 팁으로 100만원을 주었다. 하루가 24시간인 것이 아깝다며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도 피곤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그러다 내원 이틀 전 남북관계에 대한 TV뉴스를 듣고 임진각으로 달려간 것이다.
이 환자는 의학적으로 '조증(躁症)' 상태이다. 조증이란 기분이 들뜨고 말이 많아지며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장애의 일종. 이런 조증만 반복해서 경험하는 환자도 있지만, 환자 대부분은 일정 기간 조증을 경험한 후 반대로 상당기간 우울증에 빠진다. 그래서 이를 일반적으로 조울병(躁鬱病), 정확한 의학용어로는 조증과 우울증, 양극을 왔다 갔다 한다고 해서 '양극성(兩極性)장애'라고 부른다. 이 환자는 정신과에 입원한 이유가 납득되지 않는다고 가끔 화내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기분 좋게 지내고 의대생들이 실습을 나오면 맨먼저 달려가 자기소개를 하고 함께 웃고 떠든다.
조울병은 우울증과 함께 대표적인 기분장애의 하나로 대뇌의 세로토닌과 도파민의 기능장애로 인한 일종의 뇌장애이다. 따라서 약물치료가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약물로 조증이 호전돼 정상이 돼도 환자는 마음의 상처로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다. '병을 앞으로 어떻게 극복하나?', '정신과에 입원했다고 깔보면 어쩌나?', '차라리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때가 좋았는데.' 등등의 걱정을 많이 하게 된다. 이럴 때는 약물치료와 함께 마음을 보살펴 주는 정신치료도 중요하다. '선생님, 그 때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고 너무 좋았어요. 지금은 그게 다 허황된 거라니 울적하네요. 어떻게 해야 하죠?'하는 환자의 물음에 필자는 이런 대답을 한다. '예, 그렇겠네요. 하지만 사람의 원래 능력보다 더 빨리 뛰려면 반드시 어딘가에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넘어져서 오랫동안 쓰러져 있는 것보다 한걸음씩 뚜벅뚜벅 나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필자는 환자를 통해 인생을 새롭게 배운다. 그리고 이번에 배운 인생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우리도 공허하고 불안한 우울감과 열등감을 과대적 방어, 조증적 자기방어로 돌려 우쭐거리지 않는지, 욕심으로 가득 차 능력을 훨씬 넘는 일을 억지로 하려 않는지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너무 빨리 뛰려다 보면 넘어지기 십상이므로.
박원명/가톨릭대 성모병원 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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